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

제2부 제2장 선사포 첨사 <261>

정충신이 군사를 수습해 선사포 임지로 귀환 중인데 김명원 도원수로부터 밀지가 날아들었다. 전령이 가져온 밀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조명연합군 선봉대 2만이 왜군 4만 중 선봉대 2만과 벽제관에서 대치하고 있다. 왜군 원병이 계속 벽제관에 집결하고 있은즉 밀지를 받은 즉시 군사를 이끌고 벽제관 전투에 참전하라.”

한수(漢水) 이남으로 왜군을 격퇴시킨 줄 알았는데 명군이 아직 밀어내지 못하고 있는 모앙이었다. 평양을 탈환한 명군은 1593년 1월 하순, 남하 행군을 강행했는데, 벽제관 해음령·여석령(일명 숫돌고개)에서 왜군의 저항에 부닥쳤다. 눈보라 휘몰아치는 날씨를 핑계대고 명군은 느긋하게 주저앉고 말았다. 그들은 본디 게으른 데다 남의 전쟁에 큰 열의를 보이고 있지 않았다.

정충신이 군사를 챙겨 개성에 당도하자 조선군도 마찬가지로 늘어져 있었다. 기강이 해이되고 막사마다 불을 피워놓고 병사들이 아무렇게나 퍼자고 있었다.

“화급하게 오라고 해놓고 왜 이렇습니까.”

정충신이 어이가 없어 중군장, 부장들을 모아놓고 회의중인 김명원 도원수에게 달려가 물었다. 김명원은 본래 사람좋은 문신으로 유학에 조예가 깊을 뿐, 무인으로는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여송 제독이 조선군의 합류를 막아 조선군은 벽제관 근처에도 가보지 못하고 있다. 명군이 여러날 째 휴식을 취하고 있으니 우리도 대기하고 있는 것이다.”

“명군이 왜군을 뒤쫓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공전으로 나간다는 전략이다. 왜군이 한양에서 지치기를 기다란다는 것이다.”

“그들이 지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원기를 회복하는 시간을 벌어주는 것입니다. 시간을 벌면 저들이 필시 군력을 재정비할 것입니다. 평양성 승리 여세를 몰아 지금 밀어붙여야 합니다.”

“이여송 제독이 우리들더러 관여하지 말라고 했다.”

내 나라 내 땅의 일인데 관여하지 말라? 무슨 곡절이 있는 것이 분명해보였다. 전쟁을 도와준다는 명분으로 전비를 확보하려는 수작을 벌이는 것이 아닌가? 싸워주는데도 어떻게 하면 뜯어갈까를 궁리하는 것이다.

명군은 원래 늘 하던대로 현지에서 군수물자를 구입하고 자국 화폐인 은전으로 값을 지불한다고 했다. 조선은 전통적으로 화폐경제가 자리잡지 못해 외국 돈을 받는 데 주저했다. 농촌일수록 무용지물이어서 곡식을 수탈당하는 것으로 알았다. 현지에서 군수물자를 구입할 길이 막힌 명군은 약탈로 눈을 돌렸다. 왜군이 군량확보를 위해 마을을 공략하고, 명군 역시 임란 내내 보급 문제로 골머리를 앓으면서 양민을 괴롭히니 백성들은 지쳐나가 떨어질 판이었다.

“황제 만력제께서 조선 백성을 구원한다고 군량을 풀어 은혜를 베풀었는데 그것을 잊고 이제 와서 양곡 지원을 거부해? 병참선이 길어져서 군량이 들어오지 못해 화폐와 쌀을 바꾸자는 것 아닌가? 공덕을 잊는 자에게는 싸워줄 의향이 없다.”

이러니 조명연합군 협력도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더라도 정충신은 승전의 여세를 몰아 밀어붙여야 한다는 지론을 폈다.

“지금 출진해 적을 쫓아야 합니다. 왜노가 한양 도성에서 힘을 비축하면 한양 수복은 더욱 어려워질 것입니다.”

“이여송 제독이 평양성 승리를 자신의 공으로 여길 뿐, 조선군의 공훈을 인정하지 않는다. 모든 전과를 자신의 것으로 돌리려 하고 있다. 상감마마께옵서도 그렇게 믿고 있다. 지금 이여송이 상감마마와 모종의 거래를 하기 위해 지체하고 있는 것같다.”

“그렇다면 세자 저하를 움직여야지요. 전국을 돌며 분발하고 계시는 세자 저하를 만나십시오. 지금 해서지방에서 모병하고 계십니다.”

“그 말이 옳다. 전령을 보내겠다.”

김명원이 서둘러 왕세자 광해에게 파발을 띄웠다. 배천에서 모병중인 광해는 곧바로 답신을 보내왔다.

-이여송 제독 대신 명의 병부우시랑 송응창 총사령관을 움직이고 있다. 그는 경략비왜군무로 임명되어 원군 총사령관으로 왔으니 그를 움직이는 편이 낫다.

그 판단은 옳았다. 광해가 서찰을 보낸 며칠 후 송응창이 격문을 띄우고 기병을 고했다. 송응창은 격문에서 다음과 같이 기병 취지를 알렸다.

-무도한 왜노(倭奴)가 한양을 빼앗고 평양을 탈취하고 왕의 두 아들을 포로로 잡고 왕의 조상 무덤을 파헤치고, 충신을 죽이고 열부를 죽였으니, 참혹 악독하여 귀신과 사람이 함께 분해하도다. 명군이 풍우(風雨)처럼 모여 활을 당기고 창을 휘두르고, 말을 달리고 수레를 모니 깃발이 하늘의 해를 가리고, 우뢰와 같은 북소리는 바다에 파도를 일으키도다. 惡한 자를 죽이고 弱한 자를 붙들어주며 곤궁에서 구해주고 충성을 온전케 하여 천하에 대의를 펴고 만세에 이름을 날리고자 하도다. 만약 왜노가 우매하여 뉘우치지를 않고 지난날처럼 험한 것을 믿으면, 즉시 화차를 몰고 신책(神策)을 휘둘러 우뢰처럼 달려가 압록강을 건너 대마도에 이르러 왜노의 족속을 멸절시킨 다음 피를 바닷물에 뿌리고 골수를 산의 눈밭에 발라 귀역(鬼疫)을 소멸시킬 것이로다. 왕께서는 힘써 대대로 위력을 떨치도록 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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