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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일보 특별기획>대한민국의 새로운 100년평화와 번영의 한반도

기사승인 2019.04.03  19:5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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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일보 특별기획

대한민국의 새로운 100년평화와 번영의 한반도

◇1부-광주 3·1운동 재조명
(1)동경 2·8선언과 광주 유학생들
(2)남궁혁·김함라 부부, 김마리아 자매
(3)김복현(김철)가맥의 독립운동

(4)광주 고려인이 3·1만세운동에 참여 이유
(5·완)일곡마을 광산이씨 3부자와 윤혈녀

이주상·윤호·창호 3父子 같은날 검거...재판도 함께 받아
이윤호 부인 유덕례와 처남 유계문도 3·1만세운동 참여
혼인 연결 광산이씨·강릉 유씨 가문 7명 항일운동 앞장

독립군 자금모금도 관여…조선 8도에서 유례 찾기 힘들어

광산이씨 집성촌 일동마을 일곡지구 개발로 옛자취 사라져

광주 3·1운동 참여로 재판받은 103명 중 40%가 ‘미서훈’
만세운동 하다 왼팔 잘린 ‘윤혈녀’ 서훈등급 재조정도 필요

3·1운동 참가자 숭일학교 어린 학생들./숭일고 100년
3·1운동에 참가하여 옥고를 치른 수피아학교 학생들. 3·1 운동으로 투옥되었다가 같은 날 출옥한 분들의 기념사진 좌측 뒷줄 왼쪽부터 강화선, 이나열, 최경애, 양태원,. 앞줄 왼쪽부터 고연홍, 김필호, 최수향, 이봉금./수피아100년사

1919년 광주 3·1운동에 참가자 중 103명이 재판에 회부됐다. 이들 중 같은 성씨에 같은 거주지로 되어있는 사람들이 있어 자료를 찾아보니 광산군 본촌면 일곡리에서 이주상(애족장), 이윤호(애국장), 이창호(건국포장) 3부자가 같은 날 검거돼 극악무도한 고문을 받고 재판까지 함께 받은 사실이 확인됐다.

일제 강점기에 가족 중 한명만 경찰서에 잡혀가고 가정이 풍비박산이 나는데 아버지와 두 아들이 함께 고문을 받고 감옥에 갇혔으니 그 가문은 어떠했을까? 실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격정이 치민다. 광주3·1운동으로 재판을 받은 103명에 대한 국가보훈처의 공훈록과 국사편찬위의 관련 자료를 검토하다보니 일곡의 같은 마을에 이병환(징역6월)이라는 일가가 한명이 더 있었다. 또 이윤호의 부인 유덕례와 처남 유계문(징역6월)까지 광주 3·1운동에 참가한 것이 밝혀졌다.

이들 광산 이씨 3부자는 3·1운동이후 1920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군 자금모금을 같은 일곡마을 광주노씨들과 함께 주도하다가 또 옥고를 치른다. 광산 이씨와 강릉 유씨가 혼인으로 연결된 7명이나 광주 3·1만세운동과 독립군 자금모금에 참여한 경우는 당시 조선 8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사례이기에 그 숭고한 정신을 소개해 기록으로 남겨 기억하고자 한다.

일곡동 뒷산에 있는 이윤호 묘비./김재기 교수 제공

◇광산이씨 항일 학술적 조명·예우 해야

광주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당시 본촌면 일곡마을과 생룡마을에서도 농민들이 참여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국가보훈처 이주상과 범윤두(애족장)의 공훈록에는 “광주에서는 3월 10일 광주 장날을 기하여 독립만세시위를 결행하기로 계획하고 독립선언서를 인쇄하는 등 사전 준비를 했다. 거사 당일 오후 3시경 광주교 아래 강둑 소시장에 1,000여 명의 시위대가 모여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불렀다. 양림동 방면에서는 기독교인, 숭일학교, 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이 광주천을 따라 내려왔고 또 지산면 쪽에서는 수백 명의 농민이 참여했다. 일곡리의 이주상 등이 일곡·생룡 일대에 많이 살고 있는 이씨·범씨·박씨 등 인원을 동원한 결과였다.”
 

일곡동 뒷산 미서훈자 이병환의 묘./김재기 교수 제공

여기서 이씨는 일곡마을 이주상, 이윤호, 이창호 3부자를 비롯한 광산 이씨들이다. 생룡마을은 금성 범씨들의 집성촌으로 궐석재판을 받은 범윤두(애족장·징역3년)가 주도했다. 이들 중 박씨가 누구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공훈록을 보면서 더욱 가슴 아프게 한 것은 이윤호, 이창호 형제가 1931년 같은 해 3월에는 동생 이창호가 29살의 나이에, 7월에는 형 이윤호가 33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한 것이다.

이윤호의 묘비에 애절함이 그대로 적혀있다. “3·1운동의 여파가 전국 방방곡곡에 확산됨에 공은 약관의 나이에 유계문(처남) 최경동 김금석 여러 동지 및 아우인 창호와 더불어 독립선언문을 배포했고 그 후 독립운동에 필요한 군자금을 모금하다가 피체되어 징역 3년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른 뒤 후유증으로 나이 33세에 세상을 떠났으니 개탄스럽지 아니하랴. 옛적 임진왜란에 위국진충(爲國盡忠)하여 명전천추(名傳千秋)하는 이가 있었는데 공이 만약 그때 태어났다면 어찌 이에 이르지 못하였으리오.”

일곡의 옆 마을인 양지마을(양산동) 출신의 최정두(건국훈장 애족장)의 경우도 광 주3·1운동에 참여하여 28세의 나이로 사망한 것도 일제 경찰의 잔인한 고문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현재 광산이씨들의 집성촌이었던 일곡리 일동마을은 일곡지구로 개발되면서 옛 자취는 모두 사라졌다. 민족과 나라를 위해 희생한 광산이씨들의 역사적인 현장에 이 가문의 흔적이라고는 한새봉 입구의 애국지사 광산 이씨 이윤호 묘비 하나뿐이다. 후손들도 타지로 뿔뿔이 흩어져 연락도 안 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병환과 유계문, 유덕례의 경우 아직까지 미서훈자로 남아 있다. 이제라도 국가보훈처, 광주광역시와 북구청 등에서 주도해 그분들의 숭고한 희생을 선양하는 사업이 필요하다. 오는 8일 광주 북구청(문인 청장)에서 광산 이씨, 광주 노씨, 금성 범씨, 탐진 최씨 후손들과 문중 분들을 초청해 위로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다.
 

일곡동 뒷산에 있는 이윤호 묘비 뒷 면. 이윤호의 항일 행적이 기록돼 있다./김재기 교수 제공

◇광주 3·1운동 재판받은 103명…미서훈자 40%

광산이씨 가문이외에도 광주 3·1운동 참가자중 재판을 받아 확실한 기록이 있으나 100년이 흐르도록 서훈에 추서되지 못한 분들이 40여명이나 된다. 이들 미서훈자는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에서 재판을 받은 103명 직접 입력해 확인했다. 주도층으로 서정희(징역2년), 한길상(징역3년), 김종삼(징역3년), 김범수(징역3년), 강석봉(징역1년), 남궁혁(무죄) 6명이다. 수피아여학교 학생으로는 박영자(징역8월), 최경애(징역8월/집유2년), 김양순(징역4월), 이봉금(징역4월/집유2년), 이나혈(징역4월/집유2년), 양태원(징역8월/집유2년), 김필호(징역4월/집유2년) 등 7명이다.

숭일학교 학생중에는 김성민(징역10월), 이병환(징역6월), 김판철(징역6월), 장남규(징역6월), 유계문(징역6월), 김영기(징역6월), 김학선(징역4월), 김석현(징역6월), 조흥종(징역6월), 주장암(징역6월), 황맹석(징역6월), 김장수(징역6월), 양만석(징역6월/집유2년), 홍금돌(징역6월), 김상원(징역4월/집유2년) 등 15명이 미서훈자다.

농업학교는 김정수(징역1년), 황오봉(무죄방면), 최연순(징역4월) 3명이다. 일반인은 차학봉(징역4월), 민성숙(징역4월), 박재하(징역4월/집유2년), 국채진(징역4월). 박창규(징역4월/집유2년), 배광석(징역4월/집유2년), 정삼모(징역4월), 송광춘(징역10월) 황상호(징역3년) 9명이다.

여기 국가보훈처가 재판기록 등을 기초로 서훈을 추서했음에도 후손을 찾아서 알리지 않아 미전수 된 사람들도 7명이나 된다. 후손들이 이러한 서훈 사실도 모르고 어렵게 살고 있는 것이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서훈 미전수자는 홍순남(대통령표창), 임진실(대통령표창), 이태옥(대통령표창), 양순희(대통령표창), 김금석(대통령표창), 김화순(대통령표창), 이달근(애족장)이다.

여수 이순신공원 항일열사기념탑 속의 팔이 잘린 윤혈녀./김재기 교수 제공

◇만세운동으로 팔 잘리고 눈 잃은 윤혈녀

1919년 3월 11일 조선 2대 총독인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는 본국에 ‘전라남도 방면의 정황’이란 제목의 급전(急電)을 보낸다. ‘광주에서 야소교(예수교)가 주동한 군중 폭동이 일어났으며 이 중 조선인 1명이 부상당하여 경찰이 해산시켰음.’

하루 전 광주에서 일어난 3·10만세운동을 간략하게 정리해 육군성에 보고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거명된 사람은 누구일까. 당시 수피아여학교 학생으로 시위대의 맨 앞줄에 서서 일본 경찰과 맞서다가 왼팔을 잃은 윤혈녀 열사(1900∼1950·건국포장)이다.

윤혈녀는 일제의 극악한 방법을 동원한 심문에도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너의 이름은 무엇이냐? 너를 조종한 배후는 누구냐?”며 압박하는 경찰에게 윤형숙은 “나는 보다시피 피를 흘리는 조선의 혈녀다”라며 꼿꼿하게 버텼다. 경찰은 그녀를 가혹하게 고문해 오른쪽 눈까지 멀게 했다. 그녀는 ‘왼팔은 조국을 위해 바쳤고 나머지 한 팔은 문맹자를 위해 바친다’는 신념으로 일제와 맞서 싸웠다. ‘외팔이 선생’으로 불리며 여수 봉산학원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치던 그녀에게 6·25의 참화를 비껴가지 못했다. 1950년 6·25전쟁 때 인민군은 여수 둔덕동 과수원에서 그녀를 총살했다.

정부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유관순 열사에게 기존의 건국훈장 3등급 독립장에서 최고등급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광주 3·1운동에 앞장서다가 팔 짤리고 눈까지 잃은 10대 소녀 윤혈녀에게 건국훈포장 중 제일 낮은 등급인 건국포장(6등급)을 2004년에 추서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유관순 열사에 비교할 수 없지만 6등급은 건국포장은 너무 낮은 것이 아닌가?

국가는 3·1만세운동 100년과 새로운 대한민국 100년을 맞아 민족과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분들을 예우하는데 인색해서는 안 된다. 100년전 이들의 헌신이 대한민국을 만드는 튼튼한 버팀목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라도 나주 김철선생 가문의 3대와 일곡마을 이윤호 선생의 3부자에 대한 학술적 조명과 예우가 필요하다. 3·1운동 미서훈자, 미전수자를 찾아 서훈이 전수될 수 있도록 해야 하고 윤혈녀 열사처럼 서훈등급이 낮은 독립운동가들을 찾아 높여주는 국민과 함께하는 따뜻한 보훈정책이 필요하다.
/김재기(전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사)재외한인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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