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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412)

기사승인 2019.09.02  20: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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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

제4부 풍운의 길 1장 인조반정<412>

장만 도원수로서도 군량을 확보하고 무기를 증강하는 것을 막을 이유가 없었다. 지금 상황은 3국간에 분위기가 묘하게 돌아가고 있다. 후금국이 명나라 턱밑까지 쳐들어간 상태고, 모문룡 군대는 후금을 공격한다고 하지만 가도에 진을 치고 조선국을 넘나들며 명나라 황실과는 독자적 활동을 하고, 후금과는 비밀 교섭을 벌이고 있었다. 모문룡이 명나라에 충성할지, 조선에 붙을지, 후금에 붙을지 불분명한데다, 후금은 또 명나라를 치기 위해 세를 모으고 있다. 옆구리엔 모문룡이 있고, 꽁무니엔 정권이 바뀐 조선이 있다. 이들 나라를 관리해야 하는 삼중 부담을 안고 있는 것이다.

후금은 광해 재임시절 조선과 우호관계를 맺었다. 정충신이 주청(奏請)사신으로서, 또는 의주 병마좌우후로서 조선과 후금의 통로 역할을 했는데, 조선 조정은 어느날 명나라 대신 후금국을 따른다는 이유로 인조반정을 일으켜 광해를 몰아내고, 외교 방침이 급속도로 다시 친명으로 기울었다. 사대부 중신들은 반정 성공 후 맨먼저 부르짖은 것이 두 지아비를 배척해 나라를 도탄에 빠뜨린 군주를 철저히 부수는 일이었다.

“임진왜란 시 구원병을 보내줘 끝내 왜군을 물리쳐준 어버이 나라 명나라를 배척한 무도하고 철면피한 광해를 제거하는 것은 백번 옳은 일이다. 백성의 모범을 보여야 할 군왕이 의리, 명분, 원칙을 걷어찼으니 군왕의 자격이 없다. 특히 지 뱃속에서 나온 어미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엄연한 국모를 폐서인시킨 난군이자 혼군인 광해를 탄핵해야 나라의 기강이 선다!”

수백년 이어온 중국 사대주의가 제도화. 이념화되어있는데 요상한 폭군이 들어서더니 등거리 외교랍시고 어버이 나라를 걷어차고, 국모마저 밟아버리니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것이다. 나라를 위해 국제적 안목이 필요하다는 소수파의 의견도 두 지아비를 부정했다는 명분론에는 무력했다. 개혁적 외교정책, 주체적 국력 기반을 확충하겠다는 임금의 뜻은 그동안 기득권으로 연년세세 특권을 향유해온 사대부의 눈에는 하찮은 것이었다.

이에 후금으로서는 불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르하치 지도 아래 그 아들들이 집단지배 체제로 세력을 확장해나가고 있는 후금은 광해가 탄핵되자 갑자기 긴장해져 압록강과 두만강 변경에 군사력을 증강했다. 후금 정규군이 조선의 방어군을 노리고 있었고, 전통적 약탈을 일삼던 오랑캐 무리들도 강을 넘나들며 노략질을 계속했다. 정충신이 평안도 선사포 첨사를 시작으로 국경선인 조산보 만호, 보을하진 첨사, 창주 첨사, 만포진 첨사, 안주방어사로 복무하면서 누르하치의 자식들과 교류를 터 원만히 국경선을 안정시켰던 것과는 완전히 판이한 상황이었다.

정충신이 후금과의 관계를 형제국 이상으로 이끈 것은 무엇보다 누르하치 자식들과의 친목이 큰 역할을 했다. 그들 역시 관시(關係)를 국가운영과 개인우정을 중시하는 덕목으로 삼았다. 이 관시로 그들과의 관계를 도탑게 함으로써 여느때없이 국경선을 안정시켰던 것인데, 갑작스런 정권교체가 안정 기반을 뒤흔드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조선이 군사방비를 하는 것은 지휘부로서는 당연히 취해야 할 일이었다.

장만 도원수가 이괄 부원수에게 명했다.

“빨리 군사를 모으시오. 그러나 군량 확보에 있어서는 궁궐의 재정 사정이 어려우니 현지조달하시오.”

“네. 각 고을에 명령하여 군량과 물품을 영변 부원수부로 보내도록 하면 본관이 처리하겠습니다.”

“그러면 각 고을의 수령 방백들에게 통문을 보내시오.”

“그러나 부원수 이름으로 공문을 발송하는 것보다 도원수 직인이 찍힌 공문을 보내는 것이 군량을 거두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관서지방 주민들이 억세서 부원수 공문으로는 먹혀들지 의문입니다.”

“그렇다면 내 이름으로 하시오.”

도원수의 직인은 권위를 위해서도 당연했지만, 번번이 월권을 행사해온 이괄로서는 보기드문 절차를 밟고 있었다. 그것은 이괄이 어떻게든 남을 걸고 넘어지면서 명분을 축적해가기 위한 일환이었다. 많은 군량을 확보하면 민폐를 끼치고, 백성의 원성을 살 수 있다. 그래서 도원수이 이름으로 거둬들이되, 그것을 군사에게 넉넉히 먹이면 군졸과 백성들이 지휘관인 자신을 신뢰하고 존경할 것이다.

정충신 방어사 역시 안주 본진을 근거지로 하여 군사를 모으고 군량을 확보했다. 그의 군량 확보책은 고을 백성들의 곳간을 쥐어짜는 것이 아니었다. 군사를 훈련시키는 사이 빈 땅을 개간해 농사를 짓는 것이었다. 버려진 수만 평의 강변 사구(砂丘)는 고구마 감자 옥수수, 푸성귀를 심는 적지였다. 강물따라 흘러온 모래가 언덕을 이룬 사구는 계절따라 먹을 것을 재배할 수 있었다. 모래땅인지라 물이 고이지 않아 벼농사를 지을 수 없으므로 쉽게 작물을 길러 거둬먹을 수 있는 밭작물을 재배했다.

가을이 되자 천여 명의 병사가 먹을 것이 남아돌만큼 옥수수 감자 고구마, 배추 무가 산더미처럼 병영진지에 쌓였다. 여섯달 분 이상 비축하고도 남은 것들을 주민들에게 나눠주니 그들이 환호했다. 주민들을 뜯어먹는 것이 아니라 생산물을 배급하니 백성들이 서로 자식들을 군대에 보내주었다. 편히 먹고 입으라고 병영에 집어넣는 새로운 풍조가 생겼다.




<저작권자 © 남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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