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화순 해주최씨(海州崔氏) 승지공파 고사정종가
한류콘텐츠 보물창고 광주전남종가 재발견

호남 의병청 400년 지킨 의향명가
해주최씨 시조 최온 고려 권문세가
15세손 최윤범 화순 입향 종가열어
3형제 의병장과 의로운 가문 사람들
의병청 지켜 국난마다 의병 창의
오성산성과 종가의 보물 이야기

전남 화순 만연산 자락 화순천 앞에는 호남 의병군 본부가 되었던 ‘의병청’의 터(화순군 화순읍 상삼2길 31)가 있다. 호남의 의로운 병사와 군수물자를 이곳에 집결, 훈련시켜, 금산, 진주 등 전투에 출전토록 했다. 나아가 임진왜란, 정유재란, 병자호란 등에 호남 의병군을 편성시킨 것도 이 ‘의병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호남의병의 중심에 해주최씨 집안과 최경회 장군이 있다. 나라를 지킨 자부심으로 400여년을 이어온 의향명가 해주최씨(海州崔氏) 승지공파 종가를 찾아 의향의 향기를 살펴본다.
 

고사정종가 전경. 입구에는 ‘의병청지’ 표지석이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최경운, 최경장, 최경회 삼형제가 의병청을 세웠다. 의병과 군비를 모으고 훈련하여 전라도 일대와 진주성 등지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것은 이 ‘의병청지’가 기능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중앙의 '고사정'은 인조 때 종가사람 최홍우에게 남쪽 고을의 높은 선비라는 의미로 '남주고사'라는 별칭을 내린데서 '고사정' 명칭이 유래한다.
종가 종택에 큰 그늘을 주는 회화나무는 일제시대 일본 헌병이 일본 국보의 쌍이 되는 ‘언월도’를 빼앗아가기 위해 종가 사람의 상투를 매달아 고문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의병청지 우물이 우측전면에 있다. 수천명의 훈련에 필요한 식수 조달을 위해 세개의 우물을 설치했었는데 세개 중 하나만 남아 있다. /사진제공 고사정종가 최현신

◇고려 명문 해주최씨 최윤범 화순 입향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한 여섯 촌장 중 최씨(崔氏) 집안에는 고려 명재상 최충(984~1068)이 있는데, 그의 부친 최온(?~?)이 황해도 해주 토호로서 해주최씨의 시조다. ‘해동공자’ 최충은 문하시중에 오르고 최초의 사립학교 ‘9제학당’을 설립해 유학의 정착에 기여했다. 후대는 가풍을 이어 평장사를 배출하는 등 고려 명문세족의 집안이 되었다.

15세손 진사 최윤범(?~?)이 영암에서 화순에 입향해 승지공파 종가를 열었다. 최윤범의 손자 최경운(?~1596), 최경장(1529~1601), 최경회(1532~1593) 삼형제가 임진왜란 호남의병청의 명장들이다. 3형제는 학포 양팽손의 아들 양응정(1519~1581)과 외종형제 간이다.

◇의병청 설치로 호남 지킨 의향 명문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삼형제는 화순 삼천리에 의병청을 설치하고 격문을 내서 전라도 일대에서 병사·전마·군량을 모아 전열을 정비했다. 최경운의 아들 최홍재(1560~1614)가 금산전투에 출병하는 고경명 의진에 지원군을 이끌고 출병했다. 도착 전 고경명이 전사하고 그의 부장 문흥원이 잔여 병력을 이끌고 화순 의병청에 복귀했다. 이때 의병대장으로 추대된 최경회는 전북 장수로 출전해 왜군을 격퇴시키고, 무주전투에서는 도요토미히데요시의 부하 적장을 활로 거꾸러뜨리고 ‘언월도’를 전리품으로 얻었다.

◇상중에도 죽기로 싸운 혁혁한 전공

최경회는 영남으로 물러난 왜적을 진주성에서 크게 이겨 공포에 떨게 했다. 경상 병력을 모아 총력으로 공격하는 왜군에 맞선 2차 진주성 전투에서 김천일, 황진, 고종후 등과 함께 9일 밤낮을 항전했다. 원군은 없고 병기와 군량이 다하자, 북향재배하고 ‘형세가 궁하고 힘이 다하여 한 번 죽음으로 보답합니다’라며 촉석루 남강에 투신, 의연히 목숨을 바쳤다. 최경회를 따라 종전하던 조카 최홍우(1562~1636)는 ‘언월도’와 ‘청산백운도(공민왕 그림)’를 가지고 최경장에게 전했다. 최경회의 요청에 부응하여 최경장은 의병군을 이끌고 출전했다.

최경장은 양응정에게 수학하고 담양부사를 역임했다. 모친상 중이라 의병청을 관리하다가 동생 최경회가 순절하자 뒤를 이은 의병대장이 되었다. 권율의 상소를 받은 선조는 최경장을 ‘계의병대장(繼義兵大將)’으로 임명한다. 훗날 광해군이 분조를 전주에 열자 최경장은 의병청에서 훈련시킨 의병군을 김덕령 휘하에 편입시켜 권율의 지휘에 따르도록 했다.

◇오성산성 500명의 의병 귀·코 잘린 원한

최경운은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고을 사람 500여명과 함께 오성산성(전남기념물 제193호)을 지키다 왜군에 사로잡혔는데, 끝까지 왜군을 꾸짖다가 결국 목숨을 잃었다. 이는 정조의 명에 따라 1782년 화순 현감이 ‘오성산 최경운 전망 유허도(烏城山崔慶雲戰亡遺墟圖)’를 그려 올렸다고 한다.

최경회 장군의 둘째부인인 주논개(1574~1593)는 신안주씨 주달문의 차녀로서 가난하여 민며느리로 팔려가는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 살펴준 당시 장수현감 최경회를 돕다가 본부인의 유지에 따라 둘째부인이 되었다. 진주성에 종전하였다가 남편 최경회의 순절 소식을 듣고 복수를 계획하여 왜장을 붙들고 남강에 투신함으로써 남편의 복수를 대신하며 자신도 순절한다. 주씨부인을 기생(관기)으로 잘못 기록한 것은 유몽인의 ‘어우야담’ 내용 때문인데 이제는 바로잡아져야 한다. 

◇국난마다 일어서는 의로운 가문

 

조선의 역사에서 이괄의 난(최홍우), 병자호란(최명해), 이인좌의 난(최언연) 등 최씨 가문에서는 국난마다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지켰다. 420여년을 지켜온 종가의 보물은 전시관을 지어 보관하고 있고, ‘고사정’과 안채, 우물터 등이 의병청지에 있다. 안타까운 일은 2017년 전라남도 문화재로 지정되었던 ‘고사정’이 2019년 지정 취소된 일이다. 문화재가 땅값에 주는 영향을 우려한 민원에 못이긴 결과다. 종가 문중의 최현신씨는 “오성산성 전투에서 이름없이 싸우다 전사한 의병들이 기억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의병청의 거대한 회화나무는 종가가 어떻게 ‘언월도’를 지키고 충절의 가풍을 계승하는지 지켜보고 있다.
/서정현 기자 sjh@namdonews.com
 

종가 안채에서 보이는 오성산(가운데 솟은 산이 오성산성이 있었던 오성산)
언월도. 최경회 의병장의 전리품이다. 종가가 일본 헌병의 탈취 시도를 피해 보존해 온 언월도는 14세기 중국 성도의 명검 장인이 한쌍을 만들어 그중 하나는 일본의 지정 보물이 되어있고 남은 한자루가 이 ‘언월도’라고 한다. 토요토미히데요시의 부하 후쿠시마가 무주전투에서 최경회 장군의 활에 맞아 죽었고 장군은 언월도를 획득하여 왜군의 침략에 항전하는 상징물로 간직한 것이다. /사진 제공 고사정종가 최현신
언월도의 금장은 도요토미히데요시 가문의 문장이다./사진 제공 고사정종가 최현신
의병청이 있었다는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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