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장성 울산김씨(蔚山金氏) 문정공 하서종가 / 필암서원
한류콘텐츠 보물창고 광주·전남종가 재발견

인류문화유산 품은 뿌리 깊은 가문
신라·고려·조선에 이르는 명가
가문 중흥시킨 민씨부인 장성 입향
하서 김인후 문정공 종가 열어
가훈 계승한 걸출한 인물들 배출
유네스코 보존 유산 ‘한국의 서원’
 

필암서원 전경 /장성군 제공
필암서원 확연루. 서원의 외삼문이다.

백두대간 호남정맥 내장산 서쪽엔 방장산이 있다. 조선 전기에 깊은 사연을 안고 한양에서 전라도 장성 방장산 자락에 터를 잡은 여걸 여흥민씨부인을 흠모하는 가문이 장성 울산김씨 문정공 하서종가다. 종가가 지켰으나 나라의 보물이 되었고, 이제는 인류문화유산 보물이 된 종가의 전통과 내력을 살펴보았다.

◇신라 왕자 김덕지 시조

신라 경순왕의 차남이며 마의태자의 동생인 학성부원군 김덕지(914~?, 김알지의 29세손)가 울산(당시 학성)을 식읍으로 받아 울산김씨의 시조가 된다. 고려조에서는 벼슬하지 않다가 14세손 김환이 충숙왕 때 삼중대광에 올라 학성군에 책봉돼 중시조로서 세계를 이었다. 17세손 김온(1348~1413)은 한성판윤 민량의 딸 여흥민씨(1350~1421)와 혼인했다. 김온은 태조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을 도와 개국원종공신이 되고, 2차 왕자의 난에서 세운 공으로 좌명원종공신에 올라 흥려군에 봉해졌지만, 부인이 원경왕후 민씨와 사촌 간이기 때문에 태종의 외척세력 제거에 연루돼 양주목사 재임 중 화를 입었다. 민씨부인이 세 아들과 함께 장성 맥동으로 피난해 울산김씨가 장성에 뿌리를 내리게 된다.

◇가문 중흥시킨 여흥민씨 지혜

17세손 김온과 민씨부인은 슬하에 김달근(?~1466)·김달원·김달지 등 세 아들을 뒀다. 풍수에 밝은 민씨부인은 “터(밀등)로 인해 말을 탄 자손이 가득하고 5대 안에 현인이 나와 ‘필암’은 서원터가 될 것”이라 예언했다. 둘째아들 김달원의 현손 김인후(1510~1560·호는 하서·시호는 문정공)는 동방 18현인 중 한사람으로, 지금까지도 성균관과 전국 각지 향교에서 추모하고 있다. 호남유림이 그를 기리며 도학을 공부하던 사우가 정유재란 때 불타자 유림의 요청으로 서원으로 승격돼(1662년) 이설한 것이 현재의 ‘필암서원’이다.

◇문불여장성(文不如長城)

울산김씨 22세손 김인후가 문정공 종가를 열었다. 그는 세자시강원 설서로 인종과 사제관계를 맺고, 옥과현감, 승문원 제술관을 지냈다. 기묘명현에게 씌워진 누명을 중종에게 구명해 결국 인종 즉위 후 복위되고 사림의 등용문이 열리게 됐다. 8개월만에 인종이 승하하고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지병을 핑계로 낙향해 임금의 부름에도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성리학 연구와 후학 양성에 매진해 많은 저술을 남겼다. 도학·절의·문장을 모두 갖춘 선비로 존경하여 문묘에 배향되고 영의정에 추증됐다.

◇빛나는 인물 배출

김인후의 종형제이자 제자인 의병장 김경수(1542~1621)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들 김극후·김극순 형제를 이끌고 장성 남문에서 창의해 의병을 규합했다. 순창군수 김제민은 의병장으로, 자신은 맹주로 추대돼 천안·용인 등지에서 승리했다. 이듬해 2차 출병은 두 아들에게 맡겨 진주성에 파병했으나 순절했고, 정유재란 때 복수를 위해 종제인 김신남과 함께 3차 출병해 안성 전투 등에서 전과를 올렸다. 김인후 이후 19세를 이은 종가는 동아일보를 창간한 김성수, 광주학생독립운동을 변호했던 대법원장 김병로, 국무총리 김상협, 국회부의장 김녹영 등의 근·현대 인물을 배출했다.

◇가훈과 보물에 나타난 가문의 전통

종가의 가훈은 ‘박학지, 심문지, 신사지, 명변지, 독행지(배우고, 묻고, 생각하고, 구별하고, 실천함을 뜻함)’의 ‘5교(五敎)’다. 필암서원(사적 제242호)은 대원군의 서원철폐에도 화를 면해 선현 제사 공간, 교육과 학문 수련 공간, 장서 보존 공간, 기타 부대 시설 등을 잘 보존하고 있다. 유네스코가 보존유산으로 지정한 ‘한국의 서원’ 9곳 중 하나가 됐다. 서원에 보존된 14책 64매의 고문서는 서원 내력과 지방 교육제도 및 사회경제상을 알려주는 사료로 인정돼 ‘보물 제587호’로 지정됐다. 김인후 문집과 문집 목판일괄은 유형문화재 215호와 216호다. 글·사진/서정현 기자 sjh@namdonews.com
 

필암서원 현판. 현판에 대죽머리 붓필(筆)자가 아니라 초두머리 붓필자로 쓰여진 것은 왕이 서원에 사액을 내릴 때, 서적, 토지, 노비 등과 함께 하사하는 편액이 권위의 상징이므로 바꾸지 않고 보존했기 때문이다.
진덕재. 유생들이 공부하며 생활했던 동쪽 건물이다.
경장각. 정조대왕이 김인후를 문묘에 종사하면서 친필로 편액을 써주고 내탕금으로 건축비를 하사한 건물이다. 정조 친필 현판(모사)과 인종이 그린 묵죽도 판각을 보관하고 있다.

 

김성수 장성 울산김씨 도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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