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나주 밀양박씨(密陽朴氏) 청재공파 청재종가 / 남파고택
한류콘텐츠 보물창고 광주·전남 종가 재발견
1만점 근대문화 보물 보존 …나눔실천 명문가

남파고택 안채

신라 왕손 밀성대군 박언침 중시조… 사헌부 규정 박현 청백리
두문동72현 박침, 불사이군 충신… 청재공 박심문, 사육신따라 순절
박승희 부자, 근대 농업경영으로 부흥… 박준삼·준채 형제 자주독립정신 빛나

전남 나주의 진산 금성산에서 영산강으로 흐르는 나주천의 천변 명당터에는 남파고택이 있다. 이곳은 ‘근대 역사문화 사료’로써의 가치가 높아 국가 중요민속문화재 제263호로 지정됐다. 근대화와 일제침략이라는 격변기를 헤치며 의로운 정신을 간직했던 나주 밀양박씨(密陽朴氏) 청재종가를 찾아 16대를 이은 아름다운 집안내력을 살펴본다.

◇불사이군 충절과 청백리 학자 가통

신라 박혁거세 후손인 밀양박씨는 밀성(경남 밀양)을 식읍으로 받은 밀성대군 박언침(신라 경명왕의 제1왕자)이 중시조다. 고려 청백리 박현(1253~?, 밀성대군 16세손)이 규정공파 중조이고, 고려말 불사이군(不事二君·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함) 충절로 은거한 두문동72현 박침(1341~1399)의 손자 박심문이 청재공파를 열었다.

규정공 박현의 6세손인 박심문(1408~1456)은 김종서의 종사관으로 문종의 신임 속에 단종을 보필하라는 고명(믿는 신하에게 임종때 하는 말)을 받았으나 지키지 못해 세조 즉위 후 출사하지 않고 단종복위를 도모했다. 성삼문 등 사육신이 단종복위운동에 실패하자 음독 순절했다. 박심문의 삼남 박세부가 나주로, 그의 손자 박용이 진도로 입향한다. 박용의 4남 박종(1515~?)이 나주에 뿌리를 내려 나주 청재종가를 잇게 했다.

◇박승희 부자 근대적 농업경영 집안 부흥

나주 청재종가 박종의 10세손 박승희(1814~1895)와 11세손 박성호(1838~1886) 대에 이르러 근대적 농업경영으로 큰 부를 쌓았다. 이들 부자는 재배·저장·가공·판매까지 가능한 팥·콩 작물을 경작해 수익을 극대화하는가 하면, 소가 없는 농가에 소를 대여하는 우도경영을 도입함으로써 나주평야의 손꼽히는 부자가 된다. 매사에 기록을 남기고 합리적으로 사고하며 ‘이용후생’을 실생활에 도입했다.

12세손 박재규(1857~1931, 호는 남파)는 1903년 가뭄이 들자 벼 200석, 씨앗 50석을 내놓고, 벼 100석은 시장에 싸게 풀어 곡물유통에 도움을 줬다. 소작농에게 소를 나눠줘 키우게 했고 키운 소가 낳은 송아지를 주면서 자립을 도왔다. 투옥 후 석방된 의병에게 공방을 차려줬다. ‘물고기 잡는 법’을 알려주는 독특한 구빈방법을 실천한 것이다.

◇민족자주 정신 살아있는 나주협동상회

14세손 박준삼(1898~1976)은 민족의식을 가지고 신간회 나주지회를 주도했다. 일본인의 농상공업 독점 폐단을 막기 위해 ‘나주협동상회’도 설립해 ‘조선인 생산자-소비자’를 잇는 유통을 담당했다. 신개발 도정기계로 정미소를 열고, 허가 받기 어려운 제재소를 운영했다. 삼나무 재배와 삼베 명주 판권을 확보하며, 금광을 경영하는 등 민족경제 지키기에 힘쓰며 창씨개명도 거부했다. 인재양성을 위해 청운야학중학교를 설립해 한별고등공민학교(現나주중학교 전신)로 정식인가를 받았다.

동생 박준채(1914~2001)는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도인물이다. 나주-광주 통학열차에서 박기옥(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박준채 사촌누이)을 희롱하는 일본인 학생을 응징해 전국적 독립운동이 된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도화선을 제공했다. 당시 옥고를 치른 집안사람 박준채, 박공근, 박동희는 훗날 건국훈장과 건국포장을 받았다.

◇종가 보존 1만점 자료 근대역사문화 보고

나주 밀양박씨 청재공파 가훈은 ‘쓰기 위해 모으는 것이니 수전노가 되지 말고 쓸 때(공익)는 쾌척할 것’을 강조하여 후손들의 나눔실천을 이끌고 있다. 16세 종손 박경중씨는 “근대 100년의 생활양식을 알려주는 1만여점의 유물을 보존했으니 경제사, 향토사 등 연구자료로 활용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글·사진 서정현 기자 sjh@namdonews.com
 

나주읍성의 동문인 동점문
종가는 나주읍성 내에 위치하여 금성관, 목사내아 등과 함께 나주 역사문화탐방의 대표적인 명소가 되고 있다.
9동의 건축물 중 가장 먼저 지어진 초당(좌측). 우측은 안채

금성산 석산에서 만들어 종택까지 운반한 석지(물을 담아두는 용기).

빗물을 받아 잡수로 쓰는 한편, 실증적 계측으로 강수량을 가늠하여 농사에 활용했다. 100년된 석지를 운반하기 위해 집한채 값을 지불했다고 한다.
‘어떻게 만들어 옮겼을까’ 상상력을 일으키는 질문과 해설로 종가 내력을 설명하는 차종손 박재영씨.

나주 청재종가의 종손 박경중씨가 장독대 앞에서 ‘씨된장’을 비롯하여 종가가 보유한 민속보물들을 설명하고 있다.
열두가마의 쌀을 담을 수 있는 뒤주.
근대농엉경영으로 일으킨 가문의 부를 상징하는 크기의 뒤주가 독특하다.
100년된 목재 물병.
물병의 재질이 목재인데도 매우 가볍고 멋스런 디자인이 돗보인다. 1만점이 넘는 민속자료를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은 합리적 사고로 기록하고 자료를 남기는 가풍 때문이다.
종가체험프로그램 참가자들이 종가 안채 앞에서 기념촬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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