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647)

6부 7장 병자호란 전야

최명길의 생각은 이어졌다.

-국방력 강화의 한편으로 외교력으로 나라의 외연을 넓히자는 주장은 존명 사대를 외치는 주류사회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일이다. 그런데 정충신 장수는 이들의 위협과 겁박에도 의연하다. 바른 것은 끝내 이긴다고 믿는 것일까. 그의 오늘이 있게 한 힘이 밑바닥부터 출발해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는 출신 배경 때문인가, 아니면 깊은 사유의 소산인가. 그들 일원이 되면 좋은 자리 나눠갖고, 안락을 누리며, 호의호식할 수 있는데도 그 길에 나서지 않는다. 유배를 받아들일지언정 소신을 굽히지 않는다. 고이면 필연코 썩는다는 것을 가르친다. 나는 고인 사람인가, 아닌가...

최명길이 생각에 잠겨있자 장유가 참견했다.

“용골대와 마부대가 달아난 것 아시지요? 모처럼만에 시원한 일을 보았소이다.”

“시원한 일?” 정충신이 물었다.

“무식한 불한당 놈들을 쫓아버렸으니 말입니다. 오랑캐는 이렇게 혼을 내야 합니다.”

“뒷 일이 두렵지 않소? 오랑캐 족속의 성미란 한번 당하면 반드시 보복하오. 거기다 임경업 장군이 군사를 이끌고 명나라로 들어갔다니, 큰 문제요.”

“아니, 정 장수께서 임장수를 모함합니까? 그리고 백성들이 한 일을 가지고 웬 보복입니까?”

천하의 문장가 장유를 인정하지만, 정세를 보는 눈은 어둡다. 기득권의 성채에 갇혀있으니 그럴 것이다. 임경업이 변경에서 명과 후금 사이를 왔다갔다 하며 국경을 흐트려놓은 것이 사안을 엄중하게 할 가능성이 있는데도 그의 눈에는 안보이는 모양이다.

“지금 명나라를 비판하면 금수만도 못한 자가 되고, 오랑캐를 상대하자고 하면 적으로 간주하니 입도 뻥긋할 수가 없소. 그러나 사실대로 말하면 오랑캐를 쫓은 것은 나라에서 시킨 일이 분명하오. 관제 시위였단 말이오. 화친을 시도해도 부족할 판에... 긁어 부스럼이오.”

정묘호란(1627) 때, 후금과 화친을 하자는 신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정묘호란 강화회의의 어두운 분위기에서도 척화 주전 세력은 큰소리치기는 했지만, 속으로는 주화 세력의 화친과 교린을 받아들이자는 분위기였다. 평소의 척화 지론 때문에 내놓고 화친을 말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런데 어언 몇 년 세월이 흐르면서 망각해버렸다. 명을 향한 관성 탓이었다. 명나라의 승인을 얻어내는 것을 정책의 으뜸 순위로 삼으면서 그것을 고리로 기득권을 유지한 것이다. 후금과는 연이 없다는 이유로 익숙한 곳을 향해 다시 과거로 돌아가버린 것이다. 거기에 명나라는 문명국이고, 후금은 문맹국이라는 편견과 하대의식이 지배층의 사고를 지배했다. 이렇게 해서 독자적으로 유연한 외교술을 펼칠 여지를 스스로 차단해버렸다.

“명과의 관계를 독점하면서 권력을 좌지우지해왔던 세력들은 하해와 같은 부모국의 은혜를 잊지 말자는 틀을 짜 권력 유지의 본으로 삼았소. 잠시 다른 지점을 바라보더라도 아는 것이 그 뿐이어서 결국 원위치해버리오. 막대한 은이 세상에 널리 유통되고, 녹피와 호피와 말린 육포로 장사하던 여진족은 은의 유입으로 국부를 축적하고 있는데, 우리는 여전히 상업이나 공업을 노비들이나 하는 천한 업이라고 배척했소. 세상을 너무 모르오. 변화하지 않아도 떵떵거리고 사는데 웬 변화냐고 하겠소만, 주자학의 논리로만 세상을 바라보는 아집 때문에 글을 아는 사람일수록 답답한 문맹자가 되었소. 세계관이 옹졸하오. 현재 관병은 문벌을 지키기 위해 보유한 사대부의 사병보다 아래급이오. 사대부는 사병 유지를 위해 탐학질까지 하고 있소. 내 상감을 만나겠소.”

“그 몸으로 어디를 운신하시겠습니까.” 장유가 말렸다.

“내조(來朝)한 청나라 조문사절단을 홀대해 쫓아버린 것은 하수요.”

“그렇게 말한다면 오랑캐에게 비굴하게 군다고 신료들이 들고 일어날 것입니다.”

“그런 식이라면 명에 대한 충성은 비굴 아니오? 나는 결단코 비굴이 아니오. 나라를 위해 취해야 할 당연한 임무올시다. 나는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살아온 것이 아니라 미래 가치를 위해 존재하오. 청 태종 홍타이지에게 결례를 사과하고, 본래 약속대로 선린을 해야 한다고 상감께 아뢰겠소. 국경을 다스리는 일은 국방력만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오. 오판하면 나라가 무너집니다.”

“병든 몸 보전이나 잘 하시오.”

최명길, 장유가 그를 달래고 돌아간 며칠 후 정충신이 가족들을 불러들였다.

“극락강에서 잡아온 메기 매운탕을 먹고 싶구나.”

갑작스런 말에 식구들이 서로를 멀뚱히 쳐다보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정충신은 어렸을 적, 광주 인근의 극락강에서 천렵한 메기와 쏘가리, 붕어를 솥에 끓여먹었던 일이 생각났다. 헛것이 보이더니 고향이 몹시 그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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