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형구 작가의 전설따라 남도삼백리
<제2화> 명필 이삼만 (1)이야기꾼들
그림/정경도(한국화가)

그림/정경도(한국화가)

눈 내리고 북풍 몰아치는 한겨울 허물어진 흙담에 초개이엉 두른 뉘 사랑채 아랫목에 가면 으레 거기 한 마을을 아우르는 이야기꾼이 있게 마련이고, 또 한 여름 옛 마을 초입 수백 년을 자라온 커다란 느티나무 그늘 짙게 드리워진 기왓장에 푸른 이끼 돋아난 유선각(遊仙閣)에 가면 거기 구수한 입담을 풀어내는 초로의 이야기꾼들이 있게 마련이니 이 더위 뜨거운 한여름에도 이야기꾼의 소리는 활활 타는 대지의 열기를 식히고 또 거기 우스갯소리에 진한 농까지 더하여 때론 세상을 살아가는 누더기 쓴 인생의 오밀조밀한 저 깊은 내력까지 얼핏 들춰내 더듬기도 하는 것이었으니 지금은 그 자리를 텔레비전이다 컴퓨터다 휴대폰이다 하는 것들이 다 차지해 들어앉아 버려서 죄다 오래 전에 잊어져 버린 것들이겠으나 그 옛날 풍경은 그래도 시장 할 때 된장버무린 소담한 한 바구니 싱싱하고 단아한 맛깔 나는 나무새 반찬이었으리라.

주름투성이 얼굴에 하얀 수염 흩날리는 가난한 농투성이의 비루한 인생의 끄트머리에서 피어나는 구수한 입담이 마치 열반한 노승의 불 달은 뼈마디에서 쏟아지는 빛나는 사리처럼 진기한 것이기도 하였으니 또 한 겨울 혹한을 이겨내고 피어나는 매화꽃망울처럼 코끝 시리게 톡 쏘고 들어와 가슴을 시큼하게 적시는 싱싱한 향기이기도 하였거니 세상의 요긴한 잔꾀란 것들이 모두 고단하고 서러운 인생살이에서 오는 사고(思考)의 틈바구니에 낀 반짝이는 보석이고 보면 그 어찌 나무랄 데가 있겠는가!

이 삼복더위 염천 하늘아래서도 오늘 시름 다 던져두고 이마에 땀 씻어내며 저 오래 된 느티나무 아래로 가서 벌렁 드러누워 건너 먼 산을 질러오는 바람 한 조각에 더운 숨결 던져보자. 이렇게 별 볼일 없이 도연명처럼 피비린내 나는 악다구니 아귀다툼 세상 속 돈 보따리 부귀영화에 저 흔하디흔한 온갖 지위와 복락에 공명 따위 단박에 초개처럼 시궁창에 콱! 내팽개쳐 버리고 한달음에 도망해 달아나와 밤마다 귀신 나온다는 세상 끝 바깥 산모롱이 연못가 밭 자락 귀퉁이 초막 한 칸에 자신을 내던져 비루하게 숨어 살아오면서 사라져 가는 인생이 주는 마지막 객담(客談)과 그 두엄 속 같은 객담 속을 헤집으며 오늘의 쓸쓸한 객담을 쌓아가는 것이 이놈 세월이거늘, 그놈의 모진 세월 죽기 전엔 누구에게는 참 서럽고 고약한 것이렷다.

그렇다면 또 이 끝없는 길가는 떠돌이 나그네 같은 누더기 덕지덕지 기워 쓴 이놈 인생도 그 옛날 어느 그늘 짙은 유선각가에 불청객하나 떡하니 걸터앉아 천근같은 발길 산더미 같은 지친 사연 거기 쉬어두고 잠시 귀동냥이나 하렷다. 왕후장상에 권문세가, 청렴결백한 박사학자에 도둑놈 강도에 귀부인에 기생, 곰보째보에 절름발이, 무당에 중, 기생에 갈보창녀이야기 그 무엇인들 누구 눈치 살핀다고 가릴 것 있으랴! 다 똑같이 한번 왔다 가는 인생아! 째진 입 있으면 다 토해 내 보거라! 어디 이 동네 저 늙수그레한 저 양반의 입담이 그래도 오늘 이 쓸쓸하고 고단한 객의 고독한 마음을 휘어잡아 주려나? 아따! 마침 시원한 바람 불어온다.

“에 어흠! 에헤헤헤헤! 드디어 저 곰방대 핀 할아버지 허연 수염 오물오물 구수한 입담이 나온다. 에헤! 좋다! 거! 옛날 간 날에 백여시에 호랭이 담배 즐겨 퍼 묵던 시절에 말이여.......”

어느 고을에 도둑질을 아주 잘하는 적동이라는 사내가 살고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오른손 등에 작은 새알 크기의 붉은 점이 있어 제 할아버지가 붉을 적(赤)자에 아이 동(童)이라 짓고 적동이라 불렀는데, 나이 서른에 마을에서는 도둑 적(賊)자에 적동으로 멀리까지 이르게 되었고 집안에서는 도둑질로 돈을 모아 부자가 되었으니 쌓을 적(積)자에 적동으로 통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때 적동의 아버지는 그 적동이라는 이름이 싫어 글 잘하는 아이가 되라고 글 서(書)자를 써서 서동(書童)이라 부르자고 했다는데 그랬다가는 영락없이 쥐서(鼠)자 서동이가 되어 정말로 ‘쥐새끼’로 온 고을에 그 이름을 떨쳤지 않았을까 싶다.

고을에 진기한 무엇을 도둑맞기라도 하면 사람들은 으레 그 적동을 의심했는데 그 재주가 어떻게나 신출귀몰했던지 ‘꼬리가 길면 잡힌다.’는 그 옛 속담이 무색하게도 흔적과 물증을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하긴 그 생김새도 마치 생쥐를 닮아 타고난 쥐 얼굴이었는데 쥐란 동물이 평생 동안 밤에 은밀히 어두운 곳으로 다니며 남의 먹을 것을 몰래 훔쳐 먹고 사는 것이 아닌가!

쥐도 새도 모르게 도둑질을 잘한다는 그 적동의 행태를 미리부터 들어 알고 있었던 그 고을의 권력을 틀어쥐고 사는 수염이 허연 이진사는 오래전부터 그 적동을 붙잡아 크게 혼을 내주려고 마음을 먹고 여러 계책을 궁리하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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