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은 흐르고 흘러…그 세월과 함께 묻힌 강진 월남사

 

 

 

최혁 주필의 전라도 역사이야기
19. 강진 성전의 월남사지(月南寺址)와 월남마을
세월은 흐르고 흘러…그 세월과 함께 묻힌 강진 월남사
월출산 앞자락 아름답고 평온한 곳에 위치
고려 때 창건 조선중기에 폐사(廢寺)된 듯
월남사지 3층 석탑·진각국사원조비만 남아
이매리작가 월남사지 담긴 역사성을 작품화

강진 성전의 월남사지에서 바라본 월출산, 월남사는 월출산의 아름답고 적요한 풍광을 뒤로한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월남사의 과거와 현재

월출산 천황봉 남쪽 아래 볕 좋고 아늑한 곳에 큰 사찰이 있었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전남 강진군 성전면 월남리 일원이다. 사찰 이름은 월남사(月南寺)다. 월남사는 고려 때 세워진 사찰로 보인다. 창건 시기를 백제 때로 소급해 추정한 이도 있다.

월남사는 큰 사찰이었으나 조선시대 쇠퇴하다가 16세기를 전후로 해 폐사(廢寺)한 것으로 보인다. 사찰 건물은 무너지고 바스라 진 뒤 흙에 묻혔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 흙에 또 다른 흙이 덮였다. 그런 과정이 반복됐다. 자연스레 월남사는 잊혔다.

예전에 그 자리에 월남사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3층 석탑이다. 일제강점기 초만 하더라도 석탑 2개(쌍탑)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마을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1910년대 까지 쌍탑이 있었으며 1년에 한번 무위사 스님 30여명이 석탑에 비단을 감싸고 주위를 돌며 불공을 드렸다.

오랜 세월동안 절터에 흙이 덮어지고 또 덮어지면서 월남사 자리에는 집과 밭이 들어섰다. 사람들은 빈터에 집을 짓고 살았다. 그리고 집 곁에 밭을 만들어 농작물을 일궜다. 3층 석탑은 저 홀로 마을 입구에 남아 기억 속에 잊힌 월남사를 지켜내고 있었다.

월남사가 창건되고 없어진지 수백여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월남사가 자리했던 곳의 땅(퇴적층)은 그 세월의 흐름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7차 발굴조사를 통해 백제계·통일신라계·고려시대·조선시대 기와편이 출토됐다.

그 세월동안 월남사에는 얼마나 많은 일들이 벌어졌을까? 월남사가 백제시대 때 세워졌다면 신라와의 그 치열했던 전투와 고려건국과정의 싸움들, 몽골의 침입, 그리고 최씨 무인정권의 발호와 집권, 대몽항쟁 등 숱한 우여곡절이 월남사 땅위에서도 벌어졌을 것이다.

조선시대 어느 때쯤 월남사는 없어져버렸지만, 3층 석탑은 월남사지에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여전히, 그대로 굽어보고 있었을 것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갑오항쟁, 일제강점, 그리고 근현대사에 벌어진 좌우익의 갈등과 6·25전쟁과정의 학살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우아한 모습의 월남사3층석탑(해체 정비중이다.)

우리는 발굴조사를 위해 파헤쳐진 월남사지(月南寺址)에서 세월의 덧없음을 느낀다. 그렇지만 월남사지는 이 땅위에서 벌어졌던 그 수많은 역사의 질곡과 아픔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많은 고고학자들과 불교미술 연구가, 건축학자들이 월남사지와 3층 석탑이라는 ‘세월의 해저(海底)’에서 역사의 편린들을 끄집어 올리고 있다.

많은 연구가들이 조각 맞추기를 통해 완성해가고 있는 월남사의 옛 모습은 우리 역사와 문화에 대한 경외감을 더해주고 있다. 월남사는 우리가 잃어버린, 또 잊혀진 역사의 하나다. 월남사지에 대한 발굴과 연구가 절실한 것은 역사를 회복해야하기 때문이다.

월남사터에 가서 그곳을 바라보는 것은 행복이다. 살아있음에 대한 고마움, 그리고 과거 조상들의 헌신과 삶에 대한 끈질긴 애착을 느낄 수 있다. 월출산 자락 아래 월남사터에서 흥미진진한 과거로의 여행을 떠날 수 있다. 역사의 향기와 교훈을 느끼는, 소중한 행복을 가슴에 담을 수 있다.

■월남사의 창건과 폐사

발굴중인 월남사

월남사는 전라남도 기념물 제 125호로 지정돼 있다. 월남사지에 세워져 있는 안내문은 월남사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월남사는 월출산 남쪽에 있던 고려시대의 대규모 사찰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고려 진각국사 혜심(1178~1234)이 월남사를 창건하였다는 기록이 전할 뿐, 이후 언제, 어떻게, 왜 절이 없어졌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현재 월남사지에는 백제계 양식의 삼층석탑과 진각국사비가 남아있다. 월남사지 주변으로 외곽담장의 흔적이 보이며, 주변 민가에 사찰의 탑재나 건물기단석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석재가 곳곳에 남아있어 광대했던 월남사의 옛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눈여겨볼 것은 월남사지를 포근히 감싸 안고 장대하게 펼쳐진 월출산 남쪽 전경의 평온한 아름다움이다. 우아한 자태의 삼층석탑에 전해오는 석공과 그의 아내와의 사무치는 그리움에 대한 이야기에 발길이 머물고, 월남사지 특유의 여운이 깃든 고요한 분위기도 빼놓을 수 없는 이곳만의 매력이다’

월남사지에 대한 지표조사는 지난 1994년 목포대학교에서 실시했다. 2011년부터 민족문화유산연구원에서 중심 사역(寺域)에 대한 시굴조사를 벌여오고 있다. 2017년 현재까지 7차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2011년부터 시굴조사에 참여하고 있는 김진희 민족문화유산연구원 연구부장은 2017년 11월 10일의 학술대회에서 월남사의 연혁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월남사의 정확한 창건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속고승전>과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수덕사(修德寺)에 머물렀던 승려 혜현(慧顯:570~627년)이 남방 달라산(達拏山)에서 수행하다 58세에 입적하였다는 기록이 참조된다.

그리고 삼국유사에 의하면 월출산이 있는 영암군의 이름이 월내군(月奈郡)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월출산의 신라 때 이름이 月奈山이었음을 밝히고 있어 達拏山이 월출산의 옛 이름이었을 가능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즉, 신라 경덕왕 16년(757) 지명을 중국식으로 개명하면서 달라(達拏)라는 표음적 기능보다 표의적 기능이 심화되면서 월내(月奈)로 표기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속고승전은 중국 당대(唐代) 승려 도선(道宣:596~667년)이 645년에 기록한 것으로 혜현이 입적한지 18년 이후로 도선이 실제 백제에 있던 문헌을 인용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발굴중인 월남사지를 공중에서 내려다본 모습(드론으로 촬영)

한편 월남사는 혜심과 당시 최씨 무인정권과 깊은 유대를 보였으며, 그 결과 최우 정권의 핵심적인 인물들이 다수 수선사의 입사자(入社者)가 되어 수선사를 후원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혜심이 창건하였다고 하는 것은 퇴락한 월남사를 크게 중창했다고 해석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고려를 이어 새롭게 개창한 조선 초기의 불교계는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되었다. 극히 일부의 사찰만이 왕실과 연결되어 상당한 번창을 누렸으나 많은 사찰이 폐사(廢寺)되거나 사세가 위축되었다. 월남사 역시 1407년(태종 7) 도강현(道康縣)의 자복사(資福寺)로 지정된 이웃 무위사에 비해 쇠퇴를 면치 못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 완성)에 월남사가 고적조(古跡條)가 아닌 불자조(佛宇條)에 기록되고 있어 사맥을 유지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18세기 이전에 폐사되었던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이는 발굴조사결과 조선 전기 이후의 유물이 소량 출토되고 있음에서도 뒷받침되고 있다. 그러나 월남사의 창건과 변천, 성격 등은 앞으로 새로운 문헌 기록과 발굴조사 등의 학술성과에 의해 수정될 가능성도 많다’

황호균 전남대박물관학예연구사는 월남사 폐사시기에 대해 16세기 말경이라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황연구사는 백호 임제(白湖 林悌:1549~1587)의 <과월남사유지>(過月南寺遺址)라는 시에서 알 수 있듯이 16세기 후반 경에는 월남사가 폐허에 이르렀음이 확인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윤선도(尹善道:1587~1671)의 <남귀기행>에 1611년까지는 불당이 존재한 듯한 표현(淸晨繫馬月南寺 堂有畵佛庭有塔)이 등장하나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이 1656년 편찬한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부터 모든 지리지, 고지도에는 월남사가 폐사된 것으로 기록되고 있는 점을 들어 16세기 말경에 폐사에 들어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는 이같은 문헌상의 추정이 현재 진행되고 있는 월남사 발굴조사 결과와 상당히 부합된다고 말한다.

■3층석탑

정비중인 월남사3층석탑. 판넬안에 탑이 있다. 땅이 파헤쳐지면서 판넬앞 수백년 수령의 동백이 말라죽고 있어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한다.

월남사에는 보물 제298호인 월남사지 3층 석탑이 있다. 천득염 전남대학교 건축학부 교수와 정정혁은(전남대학교 건축공학과 박사과정) 논문 <강진 월남사 가람배치에 관한 고찰>에서 월남사 삼층석탑의 축조시기를 10세기 초~11세기 초로 추정한다고 밝혔다.

또 석탑 건립 주체를 친 백제적인 성격의 강력한 세력으로 보고 있다. 월남사 삼층석탑은 백제계 석탑으로 8.2m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에 100매가 넘는 많은 석재로 구성돼 있다. 이러한 규모의 석탑 건립에는 많은 인력과 자금이 투입되어야 하는데 이는 백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세력만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아쉽게도 지금 월남사지를 찾아가면 아름다우면서도 웅장한 3층 석탑의 모습을 볼 수가 없다. 해체한 뒤 복원하는 공사가 진행 중이다. 석탑은 모두 해체돼 컨테이너 박스 안에 놓여 있다. 이 같은 사실을 모르고 찾아오는 이들을 위해 예전의 탑사진이라도 크게 걸어놓으면 빈 걸음으로 돌아가는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위안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다.

대신 월남사지 삼층석탑 자리에는 다음과 같은 안내문이 놓여 있는데 삼층석탑에 관련된 전설이 매우 슬프다. 전설은 다음과 같다.

‘월남사지 삼층석탑을 조각하게 된 석공에게 아름답고 젊은 아내가 있었다. 석공은 아내를 멀리 떠나는 일이 안타까웠지만, 마음을 다잡고 아내에게 탑을 완성하고 돌아오는 날까지 절대로 나를 찾지 마시오라고 이르고 월남사로 떠났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이 없자, 아내는 남편이 너무나 보고 싶어 몰래 월남사로 찾아왔다. 먼발치에서 석탑을 쪼는 데에 열중한 남편을 바라보던 아내는 그냥 돌아가서기 너무나 아쉬워 작은 목소리로 남편을 불러보았다.

순간 벼락이 치며 석탑은 산산조각이 나버렸고, 아내는 돌로 변해버렸다. 석공은 눈물을 흘리며 아내를 어루만졌지만 아내는 대답하지 못했다. 슬픔을 추스르고 다시 석탑을 만들어야했지만, 인근에 쓸 만한 돌이 없었다. 석공은 생각 끝에 돌로 변한 아내를 옮겨 눈물로 이 석탑을 완성했다고 한다.’

물론 이 같은 전설이 사실일리 없다. 그러나 이 전설이 시사하는 것은 몇 가지가 있다.

우선 동원된 석공들이 가족들과 단절된 채 고된 작업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에 드는 돌을 만들어내기까지 수많은 노력이 기울어졌다는 것이다.

비록 남편과 아내의 사랑이야기를 등장시켜 심금을 울리게 하지만 실은 석탑을 완성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노역에 시달리고 석공들이 고생을 했는지가 이 전설에는 스며있다. 부처님의 자비를 널리 알리고 나누기 위한 불사(佛事)의 뒤 켠에 민초들의 고통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월남사 진각국사 원조탑비(眞覺國師 圓照塔碑)

진각국사원조탑비(유리 건판. 좌측 국립중앙박물관, 우측 후지타 촬영 1938년)

월남사터삼층석탑에서 서북쪽으로 100m정도를 올라가면 거북받침돌에 몸을 올린 형태의 비를 만날 수 있다. 월남사 진각국사 원조탑비다. 고려 후기의 고승으로 수선사의 제2세 사주인 진각국사 혜심(眞覺國師 慧諶, 1178~1234)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탑비이다.

일부 학자들은 진각국사가 최씨 무신정권의 최우와 그의 아들 최항의 각별한 관심을 받아 월남사를 세웠을 것으로 보고 있다. 최우는 혜심을 몹시 존경해 두 아들을 그의 제자로 보다. 혜심이 고종 25년인 1234년에 56세의 나이로 입적하자 진각국사라는 시호를 내렸다. 진각국사비 앞면은 고려 후기의 대표적 문인 이규보(李奎報)가 짓고 김효인(金孝印)이 글씨를 썼다. 뒷면은 최자(崔滋)가 서문을 짓고 탁연(卓然)이 글씨를 썼으며, 1250년(고종 27)에 세웠다. 보물 제313호로 지정돼 있다.

진각국사비는 지대석이 223×260㎝로 매우 크다. 전체적으로 웅장하다. 받침돌인 거북은 입에 구슬을 문 형상이다. 목을 길게 뺀 상태로 네발을 단단히 짚고 서 있다. 그 모습이 매우 사실적이고 강렬하게 조각돼 있다.

1938년에 촬영된 월남사지 3층 석탑 (성균관대 박물관 소장 유리원판필름)

■이매리 작가와 월남사

월남사지앞에 서 있는 이매리 작가

성전의 월남사가 이 땅위에서 모습을 감춘 지는 500여년이 훨씬 넘는 세월이다. 땅속의 유적지로만 남아있는 ‘잃어버린 월남사’를, 사진과 영상으로 이미지화 시켜 우리들에게 돌려주고 있는 사람이 있다. 그는 이매리 작가다.

이매리 작가의 본적지는 월남마을이다. 친가와 외가가 모두 월남마을에 있다. 어느 날 조부모님과 부모님이 살았던 집터이자 그의 본적지가 파헤쳐지기 시작했다. 2012년의 일이다. 월남사지에 대한 발굴조사가 시작된 것이다.

이 작가는 그래서 역사와 이주(移住)를 연관시켜 작업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이 작가는 2012년부터 발굴 전과 발굴 후, 월남사지 일대의 풍경과 모습을 사진과 영상에 담고 있다.

이 작가는 그동안 담아온 월남사의 풍경사진과 영상을 ‘Poetry Delivery 2017 (시 배달 2017)’를 통해 세상에 내놓고 있다. 개인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어떤 사물이, 어떤 장소가 전쟁과 학살, 죽음, 이주의 역사와 연결되고 있음을 시와 인터뷰로 함께 풀어내고 있다.

‘Poetry Delivery 2017 (시 배달 2017)’전시회는 ‘2017년 유네스코 미디어아트 창의도시 광주 프로젝트’로 진행됐다. 이번 전시는 광주시립미술관 하정웅미술관에서 지난 10월27일부터 11월19일까지 이어졌다.

이 작가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는 메인 전시실에 들어서면 3개의 비디오 채널과 함께 전시실 중앙에 쌓여있는 나뭇가지 더미가 눈에 들어온다. 월남리 발굴장소에 서있던 500년 수령의 동백나무가 땅이 들춰지는 바람에 죽어버렸는데 이 나뭇가지들은 그 동백나무가 남긴 유해다.

월남리 발굴현장에는 몇 백 년 그 자리를 지켜왔던 또 다른 동백나무가 있다. 그 동백나무 역시 시름시름 앓고 있다. 그 동백도 올 겨울을 넘기면 더 이상 수맥을 끌어올리지 못하고 이 세상과 이별을 할 것이다.

수백 년 동안 뿌리를 내렸던 둥지가 모두 들춰졌으니 견딜 수가 없었을 것이다. 월남사가 없어진 뒤 그 땅에 수 백 년 동안 자리 잡고 살았던 우리조상들의 삶과 추억이 한순간에 백지로 변한 것과 마찬가지다.

발굴조사를 통해 문화재는 다시 제 모습을 드러내지만, 마을 사람들의 추억은 찾아낼 길이 없다. 그래서 이매리 작가의 작품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반추한다. 이 작가의 작품을 통해 우리가 보는 것은 월남사지의 허허로운 관심이 모습이지만 실상 우리가 마음속에 그려보고 있는 것은 우리가 떠나온 고향인지도 모른다.

■월남사터에서 벌어진 근현대사의 비극

월남마을 회관. 여순사건때 끔직한 학살극이 벌어졌다.

월남마을에는 광산(光山) 이씨와 원주(原州) 이씨가 모여 사는 곳이다. 월남마을은 여순사건 때 큰 참화가 벌어졌다. 좌파 군인과 청년들이 마을 사람들을 마을회관에 몰아넣고 3일 동안을 굶긴 다음 공무원과 경찰가족, 친척들을 찾아내 학살했다. 이 마을에서만 5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여순사건이 진정되자 경찰들이 다시 몰려와 한바탕 복수를 하고 갔다. 애꿎은 마을주민들이 큰 고통을 당했다. 좌우익의 대립과 갈등은 6?25전쟁 때도 이 마을을 휩쓸고 갔다. 마을입구에 들어서 있는 마을회관 자리는 이 마을이 겪어온 비극과 풍상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월출이 품고 있는 보석 월남마을

강진달빛한옥마을과 영암산

강진사람들은 월출산을 강진월출산이 부른다. 강진 월출산을 고집하는 것을 월남마을에서 월출산을 보면 공감할 수 있다. 월출산을 배경으로 해 들어서 있는 월남마을의 풍경은 참으로 아늑하고 적요하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있을까? 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하기야 이렇게 아름답고 안온하니까 월남사가 들어섰을 것이다.

강진 출생 김선태씨는 그의 책 <강진문화답사기>에서 월남마을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월남마을은 아름답다. 처음 와 본 사람은 월출산 기슭에 이렇게 아름다운 마을이 숨겨져 있는 것을 보고 놀라게 된다. 월출산을 잘 아는 사람들은 이곳에서 올려다보는 풍경을 최고로 꼽는다.

월출산의 백발이 성성한 바위들이 이마를 번뜩이며 마을을 내려다본다. 비가 많이 오는 장마철에는 7단으로 떨어지는 칠선폭포가 월출산 계곡에 하얗게 걸린다. 그러니까 지금은 사라진 월남사는 자연과 인간이 가장 잘 조응하는 위치에 있었던 셈이다’

지금 월남마을에는 강진 달빛한옥마을이 들어서 있다. 수려한 월출산과 보기만 해도 시원한 녹차 밭 풍경을 배경으로 해 30여 채의 한옥들이 자리하고 있다. 이 달빛한옥마을은 지난 2007년 ‘월남지구 전원마을 조성사업’에 따라 만들어졌다.

주민 대부분이 귀농·귀촌한 이들이다. 여행객들이 머물면서 한옥에 머물며 월출산과 월출산 품에 자리하고 있는 10만여 평의 다원(茶園)과 백운동정원 등 주변 명소를 만끽할 수 있는 곳이다.

다원은 태평양그룹이 월출산 남쪽 기슭을 개간해 조성한 곳으로 시원한 공기를 마시며, 평온한 풍경을 만끽하며, 산책하기에 최고다. 월출을 바라보며 월출 남쪽의 깊은 숲에 안겨 몸과 마음을 편하게 누이고 싶으면 월남마을을 찾으면 된다.

■월남사지 발굴조사 학술대회

한성욱민족문화유산연구원 원장

월남사지 발굴조사 결과 중간보고를 겸한 학술대회가 2017년 11월 10일 전남 강진군 강진읍 시문학파기념관에서 학계인사와 향토사학자 등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에 열렸다. 이날 학술대회는 민족문화유산연구원(원장 한성욱)과 한국건축역사학회가 주관했다.

천득염 전남대 교수

이날 학술대회는 ‘강진월남사의 가람구조와 진각국사 원조탑비의 성격’을 주제로 열렸으며 김진희 민족문화유산연구원 연구부장이 ‘월남사 발굴조사 현황과 성과’를, 천득염 전남대 건축학부 교수가 ‘월남사 가람배치에 관한 고찰’을 주제로 각각 발표했다.

또 김희태 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이 ‘월남사 진각국사 원조탑비의 내용과 성격’을, 신용철양산시립박물관 관장이 ‘월남사 진각국사 원조탑비의 양식과 특징’을, 정현숙 원광대학교 서예문화연구소 교수가 ‘월남사 진각국사 원조탑비의 서체와 서풍’을 주제로 각각 발표했다.

주제발표 후에는 소재구 전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소장이 좌장을 맡아 종합토론이 실시됐다. 이날 학술대회에는 장흥군 장모창 학예사와 양기수 장흥향토사학자 등 많은 역사분야 관계자들이 참가했다.
도움말 = 한성욱, 김진희, 천득염, 이매리, 김선태, 강영석, 황호균
사진제공 = 전남도, 강진군, 남도여행기자단4기, 이매리, 성균관대 박물관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강진/이봉석 기자 lbs@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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