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의 가르침과 역사의 교훈, 茶禪이 깊은 곳

 

 

최혁 주필의 전라도 역사이야기
24.볼거리, 배울 거리 가득한 해남 대흥사
부처의 가르침과 역사의 교훈, 茶禪이 깊은 곳
남·북·별원에 대웅보전·침계루·명부전·응진당·천불전 등 당우 가득
김정희·이광사·이삼만·정조대왕 친필 한 곳서 보는 즐거움도 커
승병들의 義와 勇, 초의선사 자취 등 건물·장소마다 의미 깊어
 

대흥사 가을전경

해남 대흥사는 도량(道場)이다. 세상을 떠난 스님들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닦는 곳이다. 부처님을 섬기는 불자(佛者)들이 세상의 모든 희노애락(喜怒哀樂)을 마음에 품고 찾는 곳이기도 하다. 해남 대흥사는 큰 절이다. 그런 만큼 역사도 깊고 면면히 흐르는 불심(佛心)도 깊은 곳이다.

대흥사는 한국불교의 중심도량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의 본사이다. 풍담(風潭)스님으로부터 초의(草衣)스님에 이르기까지 13대종사(大宗師)를 배출했다. 또 만화(萬化)스님으로부터 범해(梵海)스님까지 열세분의 대강사(大講師)를 낳았다. 그런 만큼 대흥사가 품고 있는 선(禪)과 교(敎)의 본질을 헤아리는 쪽으로 대흥사 기행(紀行)이 써지는 것이 당연하다.

대흥사 수많은 선승(禪僧)과 교학승(敎學僧)들의 깨우침과 가르침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부처님의 자비로움을 어떻게 중생에 알려 이 땅을 극락정토(極樂淨土)로 만들려 했는지에 대한 관심과 탐구가 우선시돼야 한다. 그러나 어쩌랴, 우매한 세상 사람들은 어떤 경우 달보다는 달을 가리키는 미끈하고 예쁜 손가락에 시선이 팔릴 때가 있다.

견지망월(見指望月).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만 정신이 팔려 정녕 보아야 할 달을 보지 못한다는 뜻이다. 작가 역시 해남 대흥사에 대한 글을 쓰러 갔지만 그 도량이 품고 있는 구도(求道)의 길을 보지 않고 절 안팎의 형색에만 시선을 주고 왔다. 말 그대로 견지망월이다.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이번 전남역사 이야기는 대흥사의 외양(外樣)으로만 흐를 것 같다.

대흥사는 세상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볼거리가 참으로 많은 곳이기도 하다. 또 대흥사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구한 승병들의 의로움과 추사 김정희·원교 이광사·호남의 명필이었던 창암 이삼만, 정조대왕의 친필을 마주할 수 있다. 대웅보전 편액에는 김정희와 이광사가 등장하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담겨있다.
 

연리근. 뿌리가 붙은 채 수백년 자라났다. 우측나무가 수컷, 왼쪽 나무가 암컷이라고 여겨진다.

또 대흥사는 초의선사 발길이 곳곳에 남아 있는 곳이다. 사찰이면서 사당이 있는 특별한 곳이기도 하다. 친일파의 흔적도 숨어있다. 그 외에 광주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이들이 뜨거운 가슴으로 달려와 함께 군사독재를 이겨내자고 사자후(獅子吼)를 토했던 장소이기도 하다.

남녀 간의 사랑이 허용되지 않는 경내 한복판에 수백 년 동안 뿌리를 섞어 한 몸으로 자리하고 있는 연리근(連理根)이 있는 것도 이채롭다. 초입에서 대흥사 경내까지 이어지는 숲길과 일지암(一枝庵)에서 바라보는 경치도 일품이다.

또 대흥사는 초의선사 발길이 곳곳에 남아 있는 곳이다. 사찰이면서 사당이 있는 특별한 곳이기도 하다. 친일파의 흔적도 숨어있다. 그 외에 광주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이들이 뜨거운 가슴으로 달려와 함께 군사독재를 이겨내자고 사자후(獅子吼)를 토했던 장소이기도 하다.

남녀 간의 사랑이 허용되지 않는 경내 한복판에 수백 년 동안 뿌리를 섞어 한 몸으로 자리하고 있는 연리근(連理根)이 있는 것도 이채롭다. 초입에서 대흥사 경내까지 이어지는 숲길과 일지암(一枝庵)에서 바라보는 경치도 일품이다.

■ 두륜산과 대흥사(頭崙山 大興寺)라는 이름의 내력
 

누워있는 부처모습처럼 보이는 두륜산. 유홍준 교수에 따르면 두륜산의 원래 이름은 ‘한듬’이었다. 국토남단에 불쑥 솟은 그 형상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유 교수는 이것을 한자어와 섞어서 ‘대듬’이라고 부르더니 대둔산(大芚山)으로 불리게 됐고, ‘한듬절’은 ‘대듬절’에서 ‘대둔사’로 바뀌게 되었다고 말한다.

대흥사는 두륜산 도립공원 내에 있다. 두륜산은 전남 해남군(海南郡) 삼산면(三山面)에 있는 산으로 높이가 703m이다. 한반도 최남쪽인 해남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두륜산은 현산면(縣山面)·북평면(北平面)· 옥천면(玉泉面),북일면(北一面) 등에 걸쳐 있다. 여덟 개의 높고 낮은 봉우리로 이루어진 산이다.

우뚝 솟아 있는 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다도해의 전망이 무척 아름답다. 두륜산은 가련봉(迦蓮峰,703m)을 주봉으로 해 두륜봉(頭輪峰,630m)ㆍ고계봉(高?峰, 638m)ㆍ노승봉(능허대 685m)ㆍ도솔봉(兜率峰, 672m)ㆍ혈망봉(穴望峰, 379m)ㆍ향로봉(香爐峰, 469m)ㆍ연화봉(蓮花峰, 613m)등 8개 봉우리가 둥근 원의 모습을 하고 있다.

대흥사 해탈문에서 바라보는 두륜산은 영락없이 누워있는 부처(臥佛)의 모습이다. 두륜봉은 부처의 머리, 가련봉은 가슴, 노승봉은 손, 고계봉은 발의 형상을 하고 있다. 물결치듯 이어지는 산자락에는 난대성(暖帶性) 상록 활엽수(常綠闊獵樹)와 온대성 낙엽활엽수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봄의 춘백(春柏)과 여름의 짙은 녹음, 가을의 단풍, 겨울의 동백(冬柏)이 철따라 장관을 이룬다. 수백 년 수령의 동백나무에서 피처럼 피어나는 동백의 향연을 대하면 절로 탄성이 터져 나온다. 가을이면 두륜봉과 가련봉 사이의 넓은 억새밭에는 낭만이 출렁인다.
 

대흥사 입구에 걸려진 두륜산대둔사 현판

대흥사 입구의 산문에는 ‘두륜산대둔사’(頭崙山大芚寺)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그 밑에는 ‘대흥사 옛 이름 대둔사’라고 설명이 된 현판이 자리하고 있다. 유흥준은 그의 책 <나의문화유산답사기 1권>에서 대흥사라는 이름의 내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대흥사(大興寺)라는 명칭이 어떻게 생겼는가를 알아보면 모든 사물에 붙여진 이름의 세월 속 탈바꿈이 얼마나 우스운가를 생각해보게 된다.

두륜산의 원래 이름은 ‘한듬’이었다. 국토남단에 불쑥 솟은 그 형상에서 나온 말일 게다. 이것을 한자어와 섞어서 ‘대듬’이라도 부르더니 나중엔 대둔산(大芚山)으로 불리게 됐고 ‘한듬절’은 ‘대듬절’에서 ‘대둔사’로 바뀌게 되었다.

그런 중 또 유식한 자가 나타나서 대둔산은 중국 곤륜산(崑崙山) 줄기가 동쪽으로 흘러 백두산을 이루고 여기서 다시 뻗은 태백산줄기의 끝이라는 뜻에서 백두산과 곤류산에서 한 자씩 따서, 두륜산(頭崙山)이라고 이름 지었는데, 일제 때 전국지명을 새로 표기하면서 ‘륜’자를 바꾸어 두륜산(頭輪山)이라하고 대둔사는 대흥사로 바꾸어 놓았으니 이제 와서 두륜산대흥사라는 명칭 속에서 ‘한듬절’의 이미지는 되살릴 길이 없어지고 만 것이다. 세월의 흐름 속에 내용은 저버리고 형식만 바꾸어가다가 나중엔 그 본뜻을 잃어버리고 마는 사례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 대흥사 창건

문화재청이나 전남도·해남군은 대흥사를 소개하는 글에서 ‘신라 진흥왕 5년(백제성왕 22년)에 아도화상이 창건하였다고 전한다’고 적고 있다. 대흥사의 역사를 기록한 책으로는 <죽미기>(竹迷記)·<만일암고기>(挽日庵古記)·<북암기>(北庵記)등이 있다. 이러한 옛 기록들을 종합하여 쓴 책이 <대둔사지>다. 이 책은 수룡이성과 초의(草衣)의순이 편집하고 기어(騎漁)자홍, 호의(縞衣)시오가 교정했다. 1823년(순조23)에 간행됐다.

<만일암고기>에는 백제구이신왕 7년(426)에 신라의 정관존자가 만일암을 창건하고 그 후 백제무령왕 8년(508)에 이름을 전하지 않은 선행비구가 중건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고기(古記)에는 통일신라시대인 875년 도선국사가 중국 당나라에서 귀국한 뒤 헌강왕에게 500개의 사찰을 짓는 게 좋겠다고 건의해 이때 지은 절 가운데 하나가 대흥사라고도 전해진다.

대흥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이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대흥사를 아도화상이 창건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지만 유흥준씨는 대흥사 응진당 앞의 삼층석탑(보물 320호), 두륜산 정상 북미륵암의 마애불(보물 48호)과 삼층석탑(보물 301호)등 나라에서 보물로 지정한 대흥사의 세 유물이 모두 나말여초의 양식을 띠고 있다는 점을 들어 아도화상이나 도선국사 창건 설에 의문을 나타내고 있다.
 

대흥사 서산대사 부도

대흥사는 조선시대 중기까지만 하더라도 남도의 조그만 절이었다. 그러나 1606년 정월, 서산대사가 묘향산 원적암에서 마지막 설법을 마친 뒤 입적하면서 그의 의발 (衣鉢)을 대흥사에 보관토록 유언하면서 유명한 절이 됐다. 서산대사의 사리는 묘향산 묘현사에 안치되고 영골(靈骨)은 금강산 유점사 북쪽바위에 각각 봉안됐다.

서산대사는 임종 시 자신의 유품을 대흥사에 맡기면서 대흥사의 풍수와 관련해 ‘삼재불입지처(三災不入之處)요 만세불훼지지(萬世不毁之地)’라고 말했다고 한다. ‘두륜산 대흥사는 전쟁을 비롯한 세 가지 재앙이 닥치지 않을 곳이며 만년 동안 깨어지지 않을 땅’이라는 것이다.

서산대사의 의발이 대흥사에 보관되면서 대흥사는 말 그대로 크게 일어났다. 수많은 당우가 세워졌다. 현재 대흥사 경내에는 대웅보전을 비롯 침계루, 명부전, 응진당, 천불전, 천불상, 표충사, 대광명전, 일지암, 북미륵암, 성보박물관등이 있다. 1669년에는 서산대사와 사명당, 처영스님 등 세분의 영정을 모시는 표충사(表忠祠)가 지어졌다.
 

표충사. 정조의 글씨이다. 표충사에는 서산대사와 사명당, 처영스님 등 세분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표충사는 정면 3칸 맞배지붕의 당우다. 불국토(佛國土)에는 부처님을 모시는 시설만 세우는 법인데, 대흥사에는 큰 스님들을 모시는 사당이 마련돼 있는 것이다. 특이한 일이지만, 조선조정은 임진왜란 때의 승군 장(僧軍 將)이었던 서산대사와 스승을 도와 조선을 구해낸 사명대사, 처영대사 등을 기리는 사당을 짓도록 한 것이다.

이후 1789년에 정조대왕이 표충사라는 어필사액(御筆賜額)을 내렸다. 이에 예조는 관리를 내려보내 해마다 제사를 모시도록 했다. 표충사 정면의 의중당(義重堂)은 제사 때 제물을 차리던 집이다. 나라를 구한 큰 스님을 모시는 사당인데다, 국가가 제사를 지내는 곳이니 사람들이 그만큼 예우를 갖춰 대흥사를 대할 수밖에 없었다.

■ 대흥사의 가람배치

대흥사는 크게 세 곳의 영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크게는 침계루 앞 계곡을 경계로 삼아 남원(南院)과 북원(北院)으로 나뉘어있다. 거기다 서산대사의 사당과 유물관이 있는 표충사 일원과 대명광전 등을 별원(別院)으로 구분할 수 있다.

초창기 대흥사의 가람은 남원과 북원으로만 구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죽미기>에는 대흥사가 해탈문을 지나는 시냇물을 중심으로 남원과 북원으로 나뉘어 있었다고 적혀있다. 남원에는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한 법당과 승방이 있다. 응진당과 삼층석탑(보물 320호) 등이 있다.

북원에는 천불전을 중심으로 강원(講院)이 있다. 천불전(유형문화재 48호)은 경주 옥돌로 만든 천 분의 부처님(유형문화재 52호)을 모신 곳이다. 용화당(유형문화재 93호) 등이 있다. 별원에는 표충사(기념물 19호)와 대광명전(유형문화재 94호), 성보박물관 등이 있다. 절이 커져가면서 생겨난 사당과 당우들이다.

지금의 대흥사 모습은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특이한 것은 중심법당인 대웅보전이 경내의 왼쪽에 치우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원래는 대웅보전이 절 가운데 있었지만 대흥사 규모가 커지면서 한쪽으로 밀리는 모습이 돼버렸기 때문이다. 천불전과 표충사 등의 부속 건물들이 계속 늘어나면서, 가운데 자리가 주변 자리가 되고 만 것이다.

해탈문을 들어서면 사자를 타고 있는 문수보살과 코끼리를 타고 있는 보현보살 상이 있다. 사자는 지혜를, 코끼리는 실천을 각각 의미한다. 사자는 대흥사 경내방향이고, 코끼리는 절 반대방향, 즉 속세를 바라보고 있다. 부처님의 지혜를 얻기 위해 경내로 들어서고, 속세에 가서는 부처님의 말씀을 실천하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침계루(枕溪樓)
 

침계루 2층에 있는 사물중 운판과 법고

대흥사 남원에 있는 대웅보전을 가려면 남·북원을 가로지르는 금당천(金塘川)을 건너야 한다. 금당천에 놓인 다리가 심진교(尋眞橋)다. 심진교를 건너면 침계루(枕溪樓)가, 그 좌우에는 요사인 백설당(白雪堂)과 세진당(洗塵堂)이 자리하고 있다.

침계루는 2층 누각 건물로 아래층은 돌담과 판장문으로 마감한 광이다. 위층은 널마루를 깔고 그 위에 법고ㆍ운판ㆍ목어ㆍ범종 등 사물(四物)을 봉안했다. 좌우 측벽에는 금어 현암(玄菴)이 조성한 사천왕탱이 걸려 있다. 침계루에서는 오후 6시30분에 법고 등 불전사물이 올려 지는데 대흥사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색다른 느낌을 안겨준다.

·대흥사 대웅보전(大雄寶殿)<전남도 유형문화재 제296호>
 

대웅보전 현판(원교 이광사 글씨)

심진교를 건너 침계루를 지나면 대흥사의 중심건물인 대웅보전에 다다른다. 대웅보전은 석가모니 부처님을 주불(主佛)로 모신 곳이다. 이 건물은 1667년(조선 현종8년)심수스님에 의해 중건됐다. 그러나 1899년(광무 3년)에 화재로 불타버린 것을 복원한 것이다.

해남 대흥사 대웅보전은 조선후기의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장대석으로 높이 쌓은 단위에 기단을 마련해 지어올린 팔작지붕 건물이다. 귀기둥을 제외한 전면 기둥 상부에는 용두를 새기고 쇠서에도 연꽃을 새겨 넣었다. 각 칸마다 빗살무늬의 이분합문을 달았는데 그 기하학적 아름다움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대웅보전 건물안의 휘어진 기둥나무. 모든 사람이 제 역할이 있음을 의미한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대웅보전의 기둥은 반듯한데 건물 안의 기둥은 휘어진 것이다. 잘났든, 못났든 사람들은 모두 제 역할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 어느 중생이든 똑같이 가엽게 여기고, 자비를 베푸는 부처님의 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건물 안에는 목조삼존불이 봉안돼 있다. 삼존불은 석가불·아미타불·약사불로 구성돼 있다. 중앙의 석가불과 좌우 약사·아미타상은 양식이 서로 다르다. 조성 시기가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약사·아미타상 복장에서 발견된 <법당당주석가약사미타삼존소성복장기>에 따르면 약사와 아미타불은 1612년에 태전(太顚), 사인(思印) 등 9명의 조각승이 제작했다. 석가불은 그로부터 십 수 년 뒤에 만들어졌다. 한다.

대웅보전 위에 걸려 있는 편액은 2행 종서로 쓴 글씨다.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1705~1777)의 작품이다. 그런데 이 편액에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와 이광사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유흥준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권>에서 상상력을 동원해 이 부분을 아주 재미있게 소개한 적이 있다(87~89쪽). <나무위키>에는 나와 있는 두 사람 사이의 일화가 좀 더 재미있게 묘사됐기에 여기에서는 이를 소개한다.
대흥사 대웅보전 편액은 동국진체를 확립한 것으로 유명한 원교 이광사가 쓴 작품인데 제주도로 귀양을 가던 길에 대흥사에 들른 김정희는 이 현판을 보고는 초의선사에게 자신이 새로 써줄 테니 저딴 거는 떼어버리라고 하고 새로 현판을 써줬다. 김정희는 평소에 “조선의 글씨는 이광사가 망쳤다”라면서 이광사의 작품을 굉장히 싫어했다고 한다.

김정희의 서예론은 금석문을 통해 옛 진적을 공부해야 비로소 새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어서 향토성이 짙은 동국진체를 ‘사짜’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게다가 이광사는 소론, 그것도 그냥 소론도 아니고 양명학자였던 하곡 정제두의 제자였다. 성리학의 나라였던 조선에서 퇴계 이황이 <전습록변>을 저술해서 양명학을 까버린 이후로 양명학은 당연히 이단 취급을 받았다.

꽤 많은 성리학자들이 양주음왕〔낮에는 주자(성리학)를 따르지만 밤에는 왕수인(=양명학)을 따른다는 말〕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기는 하지만 노론 명가의 후예인 김정희가 이광사를 싫어할 이유는 생각보다 꽤 많았다.

그러나 8년여의 귀양살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대흥사에 들른 김정희는 초의선사에게 자신의 편액을 떼고 다시 원교의 편액을 걸어줄 것을 부탁하며 새로 무량수각의 현판을 써주는데 현재도 대흥사에 가면 원교와 추사의 편액이 한 공간에 걸려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보통은 거만했던 천재가 시련을 겪으면서 더욱 예술적 깊이와 안목이 넓어지고 태도도 겸허해졌다…라는 훈훈한 이야기로 해석하는 에피소드.
 

무량수각 현판

대웅보전 옆 승방인 백설당(白雪堂)에는 무량수각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추사 김정희의 글씨다. 두툼한 글씨는 굵은 통나무를 연상시킨다. 또 묵직하다. 획마다 산(山) 하나씩이 얹혀 있는 듯싶다. 조선최고의 명필가가 쓴 글자라 해서 그렇게 느껴진 걸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서예도 모르고 글씨에 대한 안목도 없지만 문외한인 작가의 눈에도 범상치 않은 글자임이 느껴진다. 이광사와 김정희의 글씨가 불과 몇 걸음을 사이에 두고 걸려 있는 것은 묘하다. 조선 최고의 서예가들의 글을 같은 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는 곳은 대흥사 밖에 없다. 추사의 인격적 성숙함 때문에 후손들이 눈 호강을 하고 있는 것이다.

백설당의 현판은 조선말기의 문신이자 서예가인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이 썼다. 그는 구한말 전라도 관찰사를 지냈다. 그는 일제에 적극 협력했다. 그리고 1910년 일제로부터 자작직위를 받았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이름이 올라있다.

대웅보전 계단석에는 두 눈을 부릅뜬 사나운 모양의 사자머리 한 쌍이 자리하고 있다. 나쁜 기운들이 접근하는 것을 막아주기 위해 조각해 둔 것이라 한다.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 석공이 만든 것이라 전해진다. 그렇다면 일본인들이 생각했던 ‘나쁜 기운’은 ‘조선인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이었을 지도 모른다. 일제강점기의 아픔은 대웅전 옆 백설당 현판에도, 계단에도 남아있다.

·윤장대(輪藏擡)

대웅보전 옆에는 윤장대가 있다. 소승불교와 관련된 유물이다. 옛날 사람들 상당수는 글을 읽지 못했다. 경전을 보기도 어려웠거니와 설령 경전이 있다 하더라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마련해 놓은 것이 윤장대이다. 이 윤장대를 한 바퀴 돌리면 경전 한 면을 읽은 것과 똑같은 공덕을 쌓은 것으로 여겼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관광객들이 하도 많이 돌려대는 바람에 파손위험이 커 돌림 목을 빼어 놓은 상태다.

·응진당(應眞堂)과 산신각(山神閣)

대웅보전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섰을 때 응진당과 산신각이 있는 건물은 우측에 있다. 응진당이 정면 3칸, 산신각이 2칸이다. 응진당에는 목조석가삼존과 석가부처님을 중심으로 문수ㆍ보현보살이 모셔져 있다.

석가모니에게는 16제자(羅漢)가 있는데 모든 중생들의 은공에 응할 수 있다고 해서 응진당이라 이름 지어졌다. 산신각은 불교가 전파되면서, 각 지역에 있었던 신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지은 건물이다. 향토신(鄕土神)은 인도의 경우 복성신, 중국은 칠성신, 조선은 산신령이다. 산신령은 호랑이를 부린다 해서 호랑이와 함께 그려진다.

·응진당 앞 3층석탑

통일신라 9세기 후반기의 석탑으로 추정된다. 대흥사내 유물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 탑은 규모는 좀 작으나 세련되고 정교하게 만들어졌다. 마치 몇 년 전에 만들어진 것처럼 돌의 색깔이 무척 밝다. 1980년대에 만들어진 안내비문이 더 마모돼 글자조차 알아보기 힘들다. 보는 이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천불전(千佛殿)
 

천불전내 천불상

천불전에는 1천구의 불상이 중앙의 삼존불을 중심으로 봉안돼 있다. 천불상은 옥석으로 제작됐다. 이 천불은 순조 13년(1813), 천불전을 중건한 완호스님이 풍계대사에게 의뢰해 경주에서 생산되는 옥석으로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천불상은 조성유래가 전해져 오고 있다. 경주에서 만들어진 천불(千佛)은 3척의 배에 실려 해남으로 오고 있었다. 그런데 한 척의 배가 울산진에서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일본 나가사키(長岐縣)에 닿았다.

일본인들은 이 옥불(玉佛)을 보고 기뻐하면서 절에 봉안하려 하였는데 꿈에 옥불들이 나타나 “우리들은 지금 조선국 해남 대흥사로 가는 중이니 이곳에 봉안될 수 없다” 말했다. 할 수없이 일본인들은 이 옥불들을 해남으로 보냈다고 한다. 그때 일본인들이 옥불 밑에 ‘日’자를 새겨 넣었다.

옥불들은 경상도의 불교신자들의 꿈에도 나타나 몸이 추우니 가사를 입혀달라고 했다. 그래서 불자들은 천불전 천불상에게 4년마다 가사를 갈아입히고 있다. 벗긴 가사를 지니고 있으면 효험이 있다고 전해진다.

·명부전(冥府殿)

지장보살이 봉안돼 있는 건물이다. 지장보살은 부처가 될 수 있음에도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보살로 남아있는 보살이다. 지장보살은 지옥의 열왕을 모시고 있다. 그래서 시왕(十王)전, 지장전, 쌍세전이라고도 불린다. ‘명부전(冥府殿)’ 편액 역시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의 글씨다.

·가허루(駕虛樓)
 

가허루. 1층 문지방이 땅으로부터 떨어져 있다. 휘어진 나무를 이용해 문지방을 썼다.

가허루는 천불전을 들어서는 입구에 있는 건물이다. 누각은 2층에 빈 공간이 있는 건물을 말한다. 그런데 가허루에는 2층 공간이 없다. 그런데도 단층 건물을 가허루라 이름 지은 것은 휘어진 나무를 이용해 문지방이 땅으로부터 떠있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휘어진 문지방을 1층으로 여기면 그 위의 건물은 자연 2층이 된다.

휘어진 나무는 그 자체로는 못나 보이는 나무다. 그러나 가허루 문지방으로 사용되면서 건물 전체의 품격을 높이는 나무가 됐다. 사람 모두가 소중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인지, 가허루 문지방을 통해 바라보는 천불전은 부드럽고 포근하다. 굽은 나무 하나로 수많은 이야기를 전하는 우리 선인들의 멋스러움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가허루 현판은 전주 지방의 명필인 창암 이삼만(1770~1847)이 쓴 것이다. 젊어서 다른 사람들의 글씨를 폄하하던 추사의 만용은 창암에게도 씌워졌다. 추사는 창암의 글씨를 보고 ‘밥은 먹고 살만한 서생의 글씨’라고 면전에서 무시했다. 더구나 창암은 추사보다 16살이나 나이가 많았다.

제주에서 귀양살이를 하면서 추사는 그 일을 후회했다. 창암의 글씨에도 나름대로의 혼과 뛰어남이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제주 귀양에서 돌아오는 길에 추사는 사과를 하기위해 창암을 찾았지만 창암은 이미 죽은 뒤였다. 전북 전주시 용진면에 있는 창암의 부인 광산김씨 묘비에 창암과 추사, 두 사람의 글씨가 앞뒤로 나란히 새겨져 있는 것은 이런 연유다.

·일지암(一枝庵)
 

일지암

대흥사 일원은 조선의 차(茶)문화를 일으키고 정립한 초의선사(艸衣禪師,1786~1866)가 40여 년간 머문 곳이다. 초의선사는 39세 때인 1824년에 일지암을 중건하고 81세 입적할 때까지 이곳에서 머물며 수행했다.

초의선사는 추사 김정희와 깊은 교류를 가졌으며 다산초당에 유배와 있던 다산 정약용 선생과도 매우 가깝게 지냈다. 대흥사 대웅보전에서 700m가량 가파른 길을 올라가면 위치해 있다. 이곳에서 초의선사는 동다송(東茶頌)이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다서를 저술하고 차를 재배해 널리 알렸다.

·미륵암(彌勒庵)

미륵암은 대흥사의 부속암자다. 일지암에서 30여분을 각각 더 올라가야 한다. 대흥사를 중심으로 남북 두 곳에 있으며 북미륵암과 남미륵암으로 부르고 있다. 북미륵암에는 용화전(龍華殿)이라는 큰 당우가 있는데 이는 오랜 세월동안 노출돼 있던 마애불을 보호하기 위해 최근에 세운 것이다.

바위에 부조돼 있는 국보 제308호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성은 규모가 크고 조각수법도 유려해 한국의 마애불상 중에서 매우 뛰어난 석불로 평가받고 있다. 네 귀퉁이에 있는 천인상 역시 매우 뛰어난 작품이다.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도움말/전남도·해남군·윤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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